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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어주는 남자

다시 성북역 - 강윤후

by tirol 2005. 1. 24.
다시 성북역

강윤후


종착역에 다가갈수록 열차가 가벼워진다
차창마다 가을 햇살 눈부시게 부대껴 쩔렁거리고
사람들이 버리고 간 신문처럼 나는 의자에 걸터앉아
흘러버린 세월이나 게으르게 뒤적인다
서둘러 지나온 세상의 역들이 귓가에 바삭대고
출입문 위에 붙은 '수도권 전철 노선도'를 천천히
읽어가던 지친 음성, 청량리 회기
휘경 신이문 석계 그리고
성북, 우린 지금 어디로 가는 거지
그때처럼 나는 아무 대답 못 한 채
고개 돌려 창밖만 바라다본다
어느새 흑백 필름이 되어 스쳐가는 풍경들
나무들은 제 이름표를 떼어내며 스스로 어두워지고
객차는 벌써 텅텅 비어 간간이 울리는 기적 소리가
먼 기억까지 단숨에 되짚어갔다가 돌아오곤 하는데
대숲처럼 마음에 빽빽이 들어찬 세월 비우지 못해
나는 자꾸 무거워진다, 갈 곳 몰라서
떠밀리듯 살아온 날들이 나를
처음의 자리로 되돌아가게 하는가, 성북
거기에 가면 기약 없는 내 기다림 아직
우두커니 남아 기다리는가
이제 열차는 종착역에 닿아 멎을 것이다
그러나 어리석은 내 기다림
거기서 또다시
시작되리라
믿는다


* tirol's thought

아마 아내는 이 시도 좋아하지 않을 것 같다.
매번 비슷한 시, 비슷한 코멘트가 상투적이라고 며칠전 아내는 심드렁하게 핀잔을 늘어놓았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이런 말투도 핀잔의 이유 중 하나였다.) 아내의 핀잔을 덜어보자고 내 맘에 안드는 시를 고를 수도 없는 노릇이고, 속에도 없는 발랄한 어조의 코멘트를 달 수도 없지 않은가.
결혼 전 내 소박한 꿈 중의 하나가 내가 쓰는 글과 내가 하는 말을 이해하고 좋아해줄 사람을 만나는 거였는데,(그리고 지금의 아내가 그런 사람이라고,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거라고 믿었는데) 그 꿈은 꿈일 뿐이었던가, 나만의 착각이었던가.
나쁜 아내 같으니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