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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어주는 남자

사평역에서 - 곽재구

by tirol 2001. 9. 16.
沙平驛에서

곽재구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창비시선 40, 곽재구 시집 '사평역에서',1983

* tirol's thought

신촌에서


전화하러간 친구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담배 연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시선을 반쯤 빈 물잔 속에 던져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오그라든 어깨를 의자 뒤에 묻어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이 때론
술 떨어진 새벽 빈 잔을 만지작거리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창 밖의 소란스런 저 젊은 기차들은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줌의 눈물을 텅 빈 물잔 속에 던져주었다


"곽재구의 '사평역에서'라는 시를 몇 소절 바꿔불러보다."


1997년 고연전 마지막날,오랫만에 만난 친구들과 신촌에서 어정쩡하게 술을 마시고 커피숍에 앉아 기차놀이로 소란스런 창밖을 보다가 장난삼아 써본 글이다.2000년 9월 29일, 다시 고연전.나는 이제 고연전에도 가지않고, 친구들을 만나서 술을 먹지도 않는다. "쓴 약같은 입술담배 연기" 를 들이마시며 침묵할 뿐. 한때, 만약 내가 시를 쓴다면, 아주 열심히 시를 쓴다면 곽재구 같은 시를 쓰게 될거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곽재구의 시는 따뜻하지만 답답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나는 곽재구가 가진 그런 답답함에서, 벗어나고 싶으나 쉽게 벗어나지 못하리란 것을 미리알고 있는 나의 한계를 읽는다. 그러나 나는 이제 시를 쓰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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