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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어주는 남자

길에 관한 독서 - 이문재

by tirol 2002. 3. 13.
길에 관한 독서

이문재


1
한때 젖은 구두 벗어 해에게 보여주곤 했을 때
어둠에도 매워지는 푸른 고추밭 같은 심정으로
아무 데서나 길을 내려서곤 하였다
떠나가고 나면 언제나 암호로 남아 버리던 사랑을
이름부르면 입 안 가득 굵은 모래가 씹혔다

2
밤에 길은 길어진다
가끔 길 밖으로 내려서서
불과 빛의 차이를 생각다 보면
이렇게 아득한 곳에서 어둔 이마로 받는
별빛 더이상 차갑지 않다
얼마나 뜨거워져야 불은 스스로 밝은 빛이 되는 것일까

3
길은 언제나 없던 문을 만든다
그리움이나 부끄러움은 아무 데서나 정거장의 푯말을 세우고
다시 펴보는 지도, 지도에는 사람이 표시되어 있지 않다

4
가지 않은 길은 잊어버리자
사람이 가지 않는 한 길은 길이 아니다
길의 속력은 오직 사람의 속력이다
줄지어 가는 길은 여간해서 기쁘지 않다


내 젖은 구두 벗어 해에게 보여줄 때, [민음사]


* tirol's thought

K에게

누군가를 좋아하게 된다고 해서
혼자일 때의 외로움이나 쓸쓸함이
사라질 거라고 기대하진 않았다 오히려
사랑이란 대개
비대칭적이기 마련이어서
혼자일 때보다 더 깊고 아득한
외로움이나 쓸쓸함에
힘들어 할 수도 있으리란 걸
막연하게나마 각오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길은 언제나 없던 문을 만드는' 법이고
사랑 또한 그 길과 같은 것이리라
그 문을 열고 그대에게 가는 길
'얼마나 뜨거워져야 불은 스스로 밝은 빛이 되는 것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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