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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어주는 남자

봄밤 - 이기철

tirol 2005. 3. 29. 12:56
봄밤

이기철


가난도 지나고 보면 즐거운 친구라고
배춧국 김 오르는 양은그릇들이 날을 부딪치며 속삭인다
쌀과 채소가 내 안에 타올라 목숨이 되는 것을
나무의 무언(無言)으로는 전할 수 없어 시로 써보는 봄밤
어느 집 눈썹 여린 처녀가 삼십 촉 전등 아래
이별이 긴 소설을 읽는가보다

땅 위에는 내가 아는 이름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서까래 아래 제 이름 가꾸듯 제 아이를 다독여 잠재운다
여기에 우리는 한 生을 살러 왔다

누가 푸른 밤이면 오리나무 숲에서 비둘기를 울리는지
동정 다는 아낙의 바느질 소리에 비둘기 울음이 기워지는 봄밤
잊혀지지 않은 것들은 모두 슬픈 빛깔을 띠고 있다

숟가락으로 되질해온 생이 나이테 없어
이제 제 나이 헤는 것도 형벌인 세월 낫에
잘린 봄풀이 작년의 그루터기 위에
또 푸르게 돋는다
여기에 우리는 잠시 주소를 적어두려 왔다

어느 집인들 한 오리 근심 없는 집이 있으랴
군불 때는 연기들은 한 가정의 고통을 태우며 타오르고
근심이 쌓여 추녀가 낮아지는 집들
여기에 우리는 한줌의 삶을 기탁하러 왔다


* tirol's thought

새로 시작하는 자의 희망 또는 의욕 같은 것들 때문인지, 뿌리에서 떨어져나와 또 다른 뿌리를 내려야 한다는 외로운 책임감 때문인지, 요즘들어 가끔씩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그럴 때면 내가 가난하다 싶기도 하고 또 반대로 부요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지금껏 살아오면서 내가 가진 것이 없어서 불편하다거나 부끄럽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별로 없는 것 같다. 그냥, 난 내가 가진 것들에 만족하고 감사하면서 살아왔다. 그래도 가끔 욕심이 생겨, 갖고 싶은 것들이 수두룩하게 머릿 속을 떠돌때 내가 주로 써먹는 방법 중의 하나는 그것들의 목록을 책상 머리에 주욱 써붙여 놓고 오래도록 들여다 보는 일이다. 그렇게 하다보면 어느날인가 그 목록 중의 몇가지들은 제 스스로 힘을 잃고 희미해지게 마련이다. 이까짓 것 없다고 뭐가 문제야? 내게 정말 이게 필요한거야? 이런 생각들을 드문드문 하다가 결국은 목록 중에 많은 부분들이 지워지게 된다. 언젠가 태어나게 될 나의 아이는 이런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나를 이해해줄까? 이해할 수 없는 아버지만의 무책임한 자기합리화라고 원망을 던지지는 않을까?
그런데 어째서 이 시를 읽다가 이런 생각이 떠올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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