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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 엄살, 아프다 - 신형철

by tirol 2008. 5. 16.

반성하는 시인보다는 엄살떠는 시인이 더 애틋하다. 간만에 제대로 된 엄살의 기록을 읽었다. 시인 심보선을 아는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1970년에 태어나 1994년에 등단했지만 오랫동안 휴업 상태로 있다가 몇 년 전 시인으로 돌아왔다. 고대했던 첫 시집 <슬픔이 없는 십오 초>(문학과지성사 펴냄)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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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이론 쪽에는 ‘문제적 개인’(루카치)이라는 개념이 있다. 이제 시 쪽에서는 ‘문제적 자아’라는 개념을 발명해보자. 반성하고 감동하고 배려하는 자아 말고, 시비 걸고 자학하고 투덜대는 자아 말이다. 우리는 시의 ‘나’가 반드시 ‘자아’와 일치할 필요는 없다고 믿는 편이지만, 이런 문제적 자아의 시는 인텔리겐치아와 프티부르주아의 틈새에서 고해성사처럼 쓰이기 때문에 죄의식이 물컹물컹 배어나와 아프다. 요즘 시에서 이런 ‘자아’가 드물고, 이런 자아의 ‘육성’이 듣기 쉽지 않고, 육성으로 울려오는 ‘엄살’을 만나기도 어렵다. 이 모든 것이 이 시집을 “빛나는 폐허”(‘아주 잠깐 빛나는 폐허’)로 만든다.

우리가 ‘엄살’이라 부르는 것은 아픔을 유난히 예민하게 인식하고 그것을 ‘화려하게’ 표현하는 능력이다. 이 ‘문제적 자아의 엄살’에는 계보가 있다. 5·16 이후 김수영의 시가 그랬고, 10년 전 황지우의 시집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문학과지성사 펴냄·1998)가, 최근에는 장석원의 시집 <아나키스트>(문학과지성사 펴냄·2005)가 그러했다. 이 시인들의 시에는 공통점이 있다. 성자(聖者)는 못 되겠지만 죽어도 ‘꼰대’는 아니 될 것 같은 사람들이 쓰는 실존적 ‘깽판’으로서의 시. 그래서 ‘형’이라 부르고 싶어진다. 나, 형의 기분 알 거 같아요, 저도 이 시대가 지긋지긋해요, 그 ‘빛나는 폐허’에 나도 끼워줘요. 그러나 시적 엄살은 전염성이 높지만 흉내내기는 어렵다. 아름다운 엄살 이전에는 숱한 몸살의 시간들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지는 게 사랑이지만, 더 많이 아파하는 사람이 이기는 게 시다.


* 한겨레 21, 신형철 칼럼 '시 읽어주는 남자' 중에서 (2008.5.15)

* tirol's thought

심보선 시집을 사서 읽어봐야겠다.
그런데 신형철씨는 책 안 내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