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읽어주는 남자483 어느 맑고 추운 날 - 박정대 어느 맑고 추운 날 박정대 이제는 쓰지 않는 오래된 옹기 위에 옥잠화가 심어진 토분을 올려놓아 보네 맑은 가을 하늘 어딘가에 투명한 여섯 줄의 현이 있을 것만 같은 오후 생각해보면, 나를 스쳐간 사랑은 모두 너무나 짧은 것들이어서 옹골찬 옹기 같은 내 사랑은 왜 나에게 와서 머물지 않았던 것인가 안타까워지는 이 오후에 햇살과 바람이 연주하는 내 기타 소리는 너무나 낡고 초라하지만 나는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슬리퍼를 직직 끌며 온몸으로 그대에게로 가네 이제는 떠나지 못하게 오래된 옹기 위에 묵직한 토분을 올려놓으며 정성스레 물을 주고 있네 그대는 옹기, 나는 토분 이렇게 우리 옹기종기 모여 추운 한 시절 견디며 킬킬대고 있네 햇살 두툼한 오후를 껴입고 나와 앉아 옹기 위에 토분을 올려 놓으며, 근사하다고 .. 2002. 11. 5. 사람들은 왜 모를까 - 김용택 사람들은 왜 모를까 김용택 이별은 손 끝에 있고 서러움은 먼데서 온다 강 언덕 풀잎들이 돋아나며 아침 햇살에 핏줄이 일어선다 마른 풀잎들은 더 깊이 숨을 쉬고 아침 산그늘 속에 산벚꽃은 피어서 희다 누가 알랴 사람마다 누구도 닿지 않은 고독이 있다는 것을 돌아앉은 산들은 외롭고 마주 보는 산은 흰 이마가 서럽다 아픈 데서 피지 않은 꽃이 어디 있으랴 슬픔은 손 끝에 닿지만 고통은 천천히 꽃처럼 피어난다 저문 산 아래 쓸쓸히 서 있는 사람아 뒤로 오는 여인이 더 다정하듯이 그리운 것들은 다 산 뒤에 있다 사람들은 왜 모를까 봄이 되면 손에 닿지 않는 것들이 꽃이 된다는 것을 * tirol's thought "아픈 데서 피지 않은 꽃이 어디 있으랴" 언젠가 종로 교보 문고에 붙어 있는 큰 걸개그림에서 본 기.. 2002. 6. 24. 흰 바람벽이 있어 - 백석 흰 바람벽이 있어 백석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十五燭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 샤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늬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조 앉어 대구국을 끓여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 2002. 5. 13. 할머니 편지 - 이동진 할머니 편지 이동진 느그들 보고 싶어 멧 자 적는다 추위에 별 일 없드나 내사 방 따시고 밥 잘 묵으이 걱정 없다 건너말 작은 할배 제사가 멀지 않았다 잊아뿌지 마라 몸들 성커라 돈 멧 닢 보낸다 공책 사라 * tirol's thought 영화 "집으로"가 예상을 깨고 3주째 박스오피스 1위를 달린다지요? "집으로"의 할머니 생각이 나서 옮겨봅니다. 2002. 4. 26. 행복론 - 최영미 행복론 최영미 사랑이 올 때는 두 팔 벌려 안고 갈 때는 노래 하나 가슴속에 묻어놓을 것 추우면 몸을 최대한 웅크릴 것 남이 닦아논 길로만 다니되 수상한 곳엔 그림자도 비추지 말며 자신을 너무 오래 들여다보지 말 것 답이 나오지 않는 질문은 아예 하지도 말고 확실한 쓸모가 없는 건 배우지 말고 특히 시는 절대로 읽지도 쓰지도 말 것 지나간 일은 모두 잊어버리되 엎질러진 물도 잘 추스려 훔치고 네 자신을 용서하듯 다른 이를 기꺼이 용서할 것 내일은 또 다른 시시한 해가 떠오르리라 믿으며 잘 보낸 하루가 그저 그렇게 보낸 십년 세월을 보상할 수도 있다고, 정말로 그렇게 믿을 것 그러나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없고 인생은 짧고 하루는 길더라 * tirol's thought 애인과 이별 후 버려야할 열가지 첫째.. 2002. 4. 15. 사랑노래 5 - 김용택 사랑노래5 김용택 마음의 끝을 보고 걸어서 마음의 끝에 가면 한쪽 어깨가 기울어 저뭄에 머리 기대고 핀 외로운 들꽃 하나 보게 되리 팍팍하게 걸어온 저문 얼굴로 헐은 어깨 기울이면 야윈 어깨 기대오던 저문 그대 마음의 끝에 서서 저뭄의 끝에 기대섰던 우리 마음의 끝을 적시며 그대는 해지는 강물로 꽃잎같이 지고 한쪽이 쓸쓸한 슬픔으로 나는 한세상을 어둑어둑 걷게 되리 * tirol's thought 유행가를 부르는 심정으로, 김용택의 오래된 사랑노래를 읽는다. 유행가란게 원래 좀 유치하기도 하고, 매양 그게 그거인거 같지만 또 그렇기에 더욱 정이 가기도 하고 가슴에 와 닿기도 하는 게 아닌가 싶다. 난 또 한 세상을 어둑어둑걸어서 술이나 마시러 가야겠다. 2002. 4. 12. 이전 1 ··· 70 71 72 73 74 75 76 ··· 81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