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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어주는 남자

고통에게1 - 나희덕

by tirol 2008. 11. 26.
고통에게 1

나희덕


어느 굽이 몇 번은 만난 듯도 하다
네가 마음에 지핀 듯
울부짖으며 구르는 밤도 있지만
밝은 날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러나 너는 정작 오지 않았던 것이다

어느 날 너는 무심한 표정으로 와서
쐐기풀을 한 짐 내려놓고 사라진다
사는 건 쐐기풀로 열두 벌의 수의를 짜는 일이 라고,
그때까지는 침묵해야 한다고,
마술에 걸린 듯 수의를 위해 삶을 짜 깁는다

손 끝에 맺힌 핏방울이 말라 가는 것을 보면서
네 속의 폭풍을 읽기도 하고,
때로는 봄볕이 아른거리는 뜰에 쪼그려 앉아
너를 생각하기도 한다

대체 나는 너를 기다리는 것인가
오늘은 비명 없이도 너와 지낼 수 있을 것 같아
나 너를 기다리고 있다 말해도 좋은 것인가

제 죽음에 기대어 피어날 꽃처럼, 봄뜰에서.


* tirol's thought

아침 출근길에 맹인 안내견의 도움을 받으며 지하철역으로 향하는 여자을 봤다.
몸이 뒤틀린 힘겨운 모습으로 열심히 걷는 뇌성마비 남자도 봤다.
고통이란 무엇인가.
나의 고통을 그들의 고통과 비교할 수 있을까.
고통을 비교하는 것이 가능할까.
'사는 건 쐐기풀로 열두 벌의 수의를 짜는 일'이라는 시인의 말은
위로인가 아픈 진실인가.
지금껏 내가 짜놓은 수의는 몇 벌쯤이나 되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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