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전체 글677 작은 짐승 - 신석정 작은 짐승 신석정 蘭이와 나는 산에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것이 좋았다 밤나무 소나무 참나무 느티나무 다문다문 선 사이사이로 바다는 하늘보다 푸르렀다 蘭이와 나는 작은 짐승처럼 앉아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것이 좋았다 짐승같이 말없이 앉아서 바다같이 말없이 앉아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것은 기쁜 일이었다 蘭이와 내가 푸른 바다를 향하고 구름이 자꾸만 놓아가는 붉은 산호와 흰 대리석 층층계를 거닐며 물오리처럼 떠다니는 청자기빛 섬을 어루만질 때 떨리는 심장같이 자지러지게 흩날리는 느티나무 잎새가 蘭이의 머리칼에 매달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蘭이와 나는 역시 느티나무 아래에 말없이 앉아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순하디순한 작은 짐승이었다 이름이 란(蘭)이라는 여자애가 있었다. 안도현 이름의 끝 글자가 '蘭'인 여자애가 있었다.. 2001. 9. 13. 이탈한 자가 문득 - 김중식 이탈한 자가 문득 김중식 우리는 어디로 갔다가 어디서 돌아왔느냐 자기의 꼬리를 물고 뱅뱅 돌았을 뿐이다 대낮보다 찬란한 태양도 궤도를 이탈하지 못한다 . 태양보다 냉철한 뭇 별들도 궤도를 이탈하지 못하므로 가는 곳만 가고 아는 것만 알 뿐이다. 집도 절도 죽도 밥도 다 떨어져 빈 몸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보았다 단 한번 궤도를 이탈함으로써 두 번 다시 궤도에 진입하지 못할지라도 캄캄한 하늘에 획을 긋는 별, 그 똥, 짧지만, 그래도 획을 그을 수 있는, 포기한 자 그래서 이탈한 자가 문득 자유롭다는 것을 김중식 시집 '황금빛 모서리'(문학과 지성사)에서 * tirol's thought 1995년께던가? '안암문예창작강좌'라는 모임에 초청 시인으로 왔던 김중식을 기억한다. '백수'로서 시쓰기...친구들과의.. 2001. 9. 13. 내리는 눈발 속에서는 - 서정주 내리는 눈발 속에서는 서정주 괜 찬 타 .... 괜 찬 타 .... 괜 찬 타 ...... 괜 찬 타 ..... 수부룩이 내려오는 눈발속에서는 까투리 메추래기 새끼들도 깃들이어 오는 소리.‥‥‥ 괜찬타... 괜찬타 ... 괜찬타..괜찬타 ... 폭으은히 내려오는 눈발속에서는 낯이 붉은 處女아이들도 깃들이어 오는 소리. ‥‥‥ 울고 웃고 수구리고 새파라니 얼어서 運命들이 모두 다 안끼어 드는 소리. ‥‥‥ 큰놈에겐 큰눈물 자죽, 작은놈에겐 작은 웃음 흔적, 큰이얘기 작은이얘기들이 오부록이 도란그리며 안끼어 오는 소리. ‥‥‥ 괜찬타 ‥‥‥ 괜찬타 ‥‥‥ 괜찬타 ‥‥‥ 괜찬타 ‥‥‥ 끊임없이 내리는 눈발속에서는 山도 山도 靑山도 안끼어 드는 소리. ‥‥‥ * tirol's thought 그래, "괜찬타..... 2001. 9. 12. 남해금산 - 이성복 남해금산 이성복 한 여자 돌속에 묻혀 있었네 그 여자 사랑에 나도 돌속에 들어갔네. 어느 여름 비 많이 오고 그 여자 울면서 돌속에서 떠나갔네. 떠나가는 그 여자 해와 달이 끌어 주었네. 남해금산 푸른 하늘가에 나 혼자 있네. 남해금산 푸른 바닷물속에 나 혼자 잠기네 /이성복, 남해 금산 (문학과지성 시인선 052), 문학과지성사, 2001년 02월/ * tirol's thought 모를일이다. 어째서 이성복의 시는 나의 눈가를 뜨끔거리게 만드는지. 솔직히 나는 그의 시를 명쾌하게 해석해낼만한 능력도 없고 어떤 구절에 사무치게 감동하는 것도 아닌데, 그냥 가만히 그의 시를 읽고 있노라면, 말로 쉽사리 표현할 수 없는 어떤 느낌이 밀려온다. 그 느낌을 두리뭉수리하게 해석해 본다면 '슬픔'에 가장 가까운 감.. 2001. 9. 10. 높은 나무 흰 꽃들은 燈을 세우고 19 - 이성복 높은 나무 흰 꽃들은 燈을 세우고 19 이성복 나의 아이는 언제나 뭘 물어야 대답하고 그것도 그저 "응" "아니요"라고만 한다 그때마다 나는 가슴이 답답하고 저 아이가 딴 아이들처럼 자기 주장을 하고 억지도 썼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때로 나의 아이가 무작정 울면서 들어오지만 아무리 물어도 제가 왜 울었는지를 모른다 나의 아이는 그 마음이 따뜻하고 나름대로 고집과 욕심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나는 무언가 마저 주지 못한 것 때문에 늘 마음이 답답하고 그것이 무엇인지 물어보지만 또 잊어버리곤 한다 나의 아이를 내가 늘 잊지 못하는 것은 저러자면 저는 얼마나 답답할까 하는 생각이 가끔씩 들기 때문이다 /이성복 시집, 호랑가시나무의 기억, 문학과지성 시인선 128,1993 / * tirol's thought .. 2001. 9. 10. 구두 구두 구두를 닦는다 침 뱉어가며 검댕 묻혀가며 닳아빠진 세월의 뒷축이여 끈덕지게 달라붙는 자잘한 슬픔의 먼지들이여 얼굴을 보여다오 상처투성이 청춘의 구두코여 주름진 외로움의 발등이여 해어진 사랑 북북찢어 추억의 손가락에 둘둘감고 땀 흘려가며 큰숨 몰아쉬어가며 구두를 닦는다 닦아도 빛나지 않는 구두여 보이지 않는 얼굴이여 손 끝에 배어 물드는 새까만 미련이여 닦이지 않는 눈물이여 1998. 2. 25. 이전 1 ··· 109 110 111 112 113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