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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은영3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 진은영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진은영 봄, 놀라서 뒷걸음질치다 맨발로 푸른 뱀의 머리를 밟다 슬픔 물에 불은 나무토막, 그 위로 또 비가 내린다 자본주의 형형색색의 어둠 혹은 바다 밑으로 뚫린 백만 킬로의 컴컴한 터널 ―여길 어떻게 혼자 걸어서 지나가? 문학 길을 잃고 흉가에서 잠들 때 멀리서 백열전구처럼 반짝이는 개구리 울음 시인의 독백 “어둠 속에 이 소리마저 없다면” 부러진 피리로 벽을 탕탕 치면서 혁명 눈 감을 때만 보이는 별들의 회오리 가로등 밑에서는 투명하게 보이는 잎맥의 길 시, 일부러 뜯어본 주소 불명의 아름다운 편지 너는 그곳에 살지 않는다 * tirol's thought 회의를 하다보면 가끔 이런 생각이 든다. '우리가 정말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게 맞을까?' 같은 단어를 말하고 있지만.. 2019. 1. 24.
물속에서 - 진은영 물속에서 진은영 가만히 어둠 속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 내가 모르는 일이 흘러와서 내가 아는 일로 흘러갈 때까지 잠시 떨고 있는 일 나는 잠시 떨고 있을 뿐 물살의 흐름은 바뀌지 않는 일 물속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 푸르던 것이 흘러와서 다시 푸르른 것으로 흘러갈 때까지 잠시 투명해져 나를 비출 뿐 물의 색은 바뀌지 않는 일 (그런 일이 너무 춥고 지루할 때 내 몸에 구멍이 났다고 상상해볼까?) 모르는 일들이 흘러와서 조금씩 젖어드는 일 내 안의 딱딱한 활자들이 젖어가며 점점 부드러워지게 점점 부풀어 오르게 잠이 잠처럼 풀리고 집이 집만큼 커지고 바다가 바다처럼 깊어지는 일 내가 모르는 일들이 흘러와서 내 안의 붉은 물감 풀어놓고 흘러가는 일 그 물빛에 나도 잠시 따스해지는 그런 상상 속에서 물속에 .. 2012. 5. 8.
70년대산(産) - 진은영 70년대산(産) 진은영 우리는 목숨을 걸고 쓴다지만 우리에게 아무도 총을 겨누지 않는다 그것이 비극이다 세상을 허리 위 분홍 훌라후프처럼 돌리면서 밥 먹고 술 마시고 내내 기다리다 결국 서로 쏘았다 / 진은영, 우리는 매일매일 문학과지성 시인선 351, 문학과지성사, 2008년 08월/ * tirol's thought '보이는 적'은 은혜롭다. 내가 살아야 할 이유를 만들어주고, 함께 싸워야할 우리를 손잡게 하는. 어떤 놈이 주식으로 돈을 더 벌었나 경쟁하고 누구 차가 더 좋은가 침을 튀기고 누구 집이 더 넓은가 뺨을 재고 누구 아이가 더 좋은 학교에 갔는가 귀를 세우며 우리는 그렇게 먹고 마시고 경쟁하고 기다리다가 결국 서로 쏜 총에 피 흘린다 아프다 2008. 9.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