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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복12

밤이 오면 길이 - 이성복 밤이 오면 길이 이성복 밤이 오면 길이 그대를 데려가리라 그대여 머뭇거리지 마라 물결 위에 뜨는 죽은 아이처럼 우리는 어머니 눈길 위에 떠 있고, 이제 막 날개 펴는 괴로움 하나도 오래 전에 예정된 것이었다 그대여 지나가는 낯선 새들이 오면 그대 가슴속 더운 곳에 눕혀라 그대 괴로움이 그대 뜻이 아니듯이 그들은 너무 먼 곳에서 왔다 바람 부는 날 유도화의 잦은 떨림처럼 순한 날들이 오기까지, 그대여 밤이 오는 쪽으로 다가오는 길을 보아라 어둡지도 밝지도 않은 길이 그대를 데려가리라 tirol's thought 지난 일요일 저녁, 외출했다가 집에 오는 길에 라디오를 들었는데 '저녁'에 관련된 시 네 편을 읽어주는 코너가 있었다. 김종삼, 정끝별, 채호기, 그리고 이성복 시인의 시였다. 다른 시들은 다 읽어.. 2022. 8. 3.
연애에 대하여 - 이성복 연애에 대하여 이성복 1 여자들이 내 집에 들어와 지붕을 뚫고 담 넘어간다 손이 없어 나는 붙잡지 못한다 벽마다 여자만한 구멍이 뚫려 있다 여자들이 내 방에 들어와 이불로 나를 덮어 싼다 숨 막혀 죽겠어 ! 이불 위에 올라가 여자들이 화투를 친다 숨 막힌 채로 길 떠난다 길 가다 외로우면 딴 생각하는 길을 껴안는다 2 기도의 형식으로 나는 만났다 버리고 버림받았다 기도의 형식으로 나는 손 잡고 입맞추고 여러 번 죽고 여러 번 태어났다 흐르는 물을 흐르게 하고 헌 옷을 좀먹게 하는 기도, 완벽하고 무력한 기도의 형식으로 나는 숨쉬고 숨졌다 지금 내 숨가쁜 屍身을 밝히는 촛불들 愛人들, 지금도 불 밝은 몇몇의 술집 3 내 살아 있는 어느 날 어느 길 어느 골목에서 너를 만날지 모르고 만나도 내 눈길을 너는 .. 2020. 6. 21.
다시 봄이 왔다 - 이성복 다시 봄이 왔다 이성복 비탈진 공터 언덕 위 푸른 풀이 덮이고 그 아래 웅덩이 옆 미루나무 세 그루 갈라진 밑동에도 푸른 싹이 돋았다 때로 늙은 나무도 젊고 싶은가 보다 기다리던 것이 오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누가 누구를 사랑하고 누가 누구의 목을 껴안 듯이 비틀었는가 나도 안다 돼지 목 따는 동네의 더디고 나른한 세월 때로 우리는 묻는다 우리의 굽은 등에 푸른 싹이 돋을까 묻고 또 묻지만 비계처럼 씹히는 달착지근한 혀, 항시 우리들 삶은 낡은 유리창에 흔들리는 먼지 낀 풍경 같은 것이었다 흔들리며 보채며 얼핏 잠들기도 하고 그 잠에서 깨일 땐 솟아오르고 싶었다 세차장 고무 호스의 길길이 날뛰는 물줄기처럼 갈기갈기 찢어지며 아우성치며 울고불고 머리칼 쥐어뜯고 몸부림치면서...... 그런 일은 없었.. 2019. 3. 21.
꽃은 어제의 하늘 속에 - 이성복 꽃은 어제의 하늘 속에 이성복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 속에 있지 않다 사람이 사랑 속에서 사랑하는 것이다 목 좁은 꽃병에 간신히 끼여 들어온 꽃대궁이 바닥의 퀘퀘한 냄새 속에 시들어가고 꽃은 어제의 하늘 속에 있다 /이성복 시집, 아, 입이 없는 것들, 문학과지성사/ * source: http://suyunomo.net/?p=4042 * tirol's thought 오랫만에 이성복의 시를 읽는다. 좋다. 이성복의 시치고는 꽤 쉬운 시다. 점점 어려운 시를 읽기가 어려워진다. 예전에는 쉬운 시를 읽기가 어려웠는데. 어느날인가 쉬운 시도 어려운 시도 읽기 어려워지는 때가 오려나? '내가'라는 주어를 벗어던지는 일은 얼마나 어려운가. '내가'라고 시작하는 문장은 늘 무엇인가를 '내' 속에 종속시키려 든다. 마치.. 2010. 8. 16.
내 생에 복수하는 유일한 방법처럼 - 이성복 내 생에 복수하는 유일한 방법처럼 이성복진해에서 훈련병 시절 외곽 초소 옆 개울물에 흰 밥알이 떠내려왔다 나는 엠원 소총을 내려놓고 옹달샘 물을 마시는 노루처럼 밥알을 건져 먹었다 물론 배도 고팠겠지만 밥알을 건져 먹는 내 모습을 보고 싶어서였다 나는 나를 비참하게 만들어 생에 복수하고 싶었다 매점 앞에서 보초 설 때는, 단팥빵 맛이 조금만 이상해도 바닥에 던지고 가는 녀석들이 있었다 달려드는 중대장의 셰퍼드를 개머리판으로 위협하고, 나는 흙 묻은 빵을 오래 씹었다 비참하고 싶었다 비참하고 싶은 나를 바라보고 싶었다 내 생에 복수하는 유일한 방법처럼 또 일병 달고 구축함 탈 때, 내게 친형처럼 잘해주던 서울 출신 중사가 자기 군화에 미역국을 쏟았다고, 비 오는 비행 갑판에 끌고 올라가 발길질을 했다 처음.. 2006. 5. 29.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 - 브레히트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Schlechte Zeit fur Lyrik ) 베르톨트 브레히트 (Bertolt Brecht) 김광규 역 나도 안다. 행복한 자만이 사랑받고 있음을 그의 음성은 듣기 좋고, 그의 얼굴은 잘생겼다. 마당의 구부러진 나무가 토질 나쁜 땅을 가리키고 있다. 그러나 지나가는 사람들은 으레 나무를 못생겼다 욕한다. 해협의 산뜻한 보우트와 즐거운 돛단배들이 내게는 보이지 않는다. 내게는 무엇보다도 어부들의 찢어진 어망이 눈에 띌 뿐이다. 왜 나는 자꾸 40대의 소작인 처가 허리를 꾸부리고 걸어가는 것만 이야기하는가? 처녀들의 젖가슴은 예나 이제나 따스한데. 나의 시에 운을 맞춘다면 그것은 내게 거의 오만처럼 생각된다. 꽃피는 사과나무에 대한 감동과 엉터리 화가에 대한 경악이 나의 가슴 속.. 2003. 11.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