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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찬호2

만년필 - 송찬호 만년필 송찬호이것으로 무엇을 이룰 수 있었을 것인가 만년필 끝 이렇게 작고 짧은 삽날을 나는 아직껏 본 적이 없다 한때, 이것으로 허공에 광두정을 박고 술 취한 넥타이나 구름을 걸어두었다 이것으로 근엄한 장군의 수염을 그리거나 부유한 앵무새의 혓바닥 노릇을 한 적도 있다 그리고 지금은 이것으로 공원묘지에 일을 얻어 비명을 읽어주거나, 비로소 가끔씩 때늦은 후회의 글을 쓰기도 한다.그리하여 볕 좋은 어느 가을날 나는 눈썹 까만 해바라기씨를 까먹으면서, 해바라기 그 황금 원반에 새겨진'파카'나 '크리스탈'이니 하는 빛나는 만년필시대의 이름들을 추억해보는 것이다.그러면서 나는 오래된 만년필을 만지작거리며 지난날 습작의 삶을 돌이켜본다--만년필은 백지의 벽에 머리를 짓찧는다 만년필은 캄캄한 백지 속으로 들어가 .. 2006. 3. 22.
머리 흰 물 강가에서 - 송찬호 머리 흰 물 강가에서 송찬호 봄날 강가에서 배를 기다리다 머리 흰 강물을 빗질하는 늙은 버드나무를 보았네 늘어진 버드나무 가지를 밀고 당기며 강물은 나직나직이 노래를 불렀네 버드나무 무릎에 누워 나, 머리 흰 강물 푸른 머리카락 다 흘러가버렸네 배를 기다리다 기다리다 나는 바지를 징징 걷고 얕은 강물로 걸어들어갔네 봄날 노래 소리 나직나직이 내 발등을 간지르며 지나갔네 버드나무 무릎에 누워 나, 머리 흰 강물 푸른 머리카락 다 흘러가버렸네 /송찬호 시집, 붉은 눈, 동백, 문학과지성사, 2000/ 한국인에게 아주 친숙한 풍경이다. 실제로 살기로야 아득바득 씩씩대며 용트림하고 싶어 용쓰고 있지만, 어느 쉴 참에, 두 손 놓을 어느 참에, 가만히 거울 앞에 서 보면 그저 얻은 것 없이 무언가 한없이 기다리다.. 2005. 9.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