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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4

오래된 여행가방 - 김수영 오래된 여행가방 김수영 스무살이 될 무렵 나의 꿈은 주머니가 많이 달린 여행가방과 펠리컨 만년필을 갖는 것이었다. 만년필은 주머니 속에 넣어두고 낯선 곳에서 한번씩 꺼내 엽서를 쓰는 것. 만년필은 잃어버렸고, 그것들을 사준 멋쟁이 이모부는 회갑을 넘기자 한달 만에 돌아가셨다. 아이를 낳고 먼 섬에 있는 친구나, 소풍날 빈방에 홀로 남겨진 내 짝 홍도, 애인도 아니면서 삼년 동안 편지를 주고받은 남자, 머나먼 이국 땅에서 생을 마감한 삼촌....... 추억이란 갈 수록 가벼워지는 것. 잊고 있다가 문득 가슴 저려지는 것이다. 이따금 다락 구석에서 먼지만 풀썩이는 낡은 가방을 꺼낼 때마다 나를 태운 기차는 자그락거리며 침목을 밟고 간다. 그러나 이제 기억하지 못한다. 주워온 돌들은 어느 강에서 온 것인지, .. 2006. 2. 20.
사랑 - 김수영 사랑 김수영 어둠 속에서도 불빛 속에서도 변치않는 사랑을 배웠다 너로해서 그러나 너의 얼굴은 어둠에서 불빛으로 넘어가는 이 찰나에 꺼졌다 살아났다 너의 얼굴은 그만큼 불안하다 번개처럼 번개처럼 금이 간 너의 얼굴은. * tirol's thought 그해 오월에도 역시 장미꽃이 한창 피었드랬다. 그녀에게 이 시를 외워주며 아침 등교길에 본 장미꽃 이야기를 했던 것도 같다. 장미꽃 얘기 외에도 난, 시내버스가 코너를 도는 사거리부터 학교 앞까지 심어진 가로수 갯수가 몇개인지 아느냐고, 사거리에 나란히 서있는 열 몇개의 게양대 중에서 몇번째 새마을기가 내려가 있는지 아느냐고 물었다. 그리곤, 너에게만 알려주겠노라고, 세상에 나밖에 아무도 모르는 그 숫자들을 얘기해주겠노라고 허세를 부렸다.(물론 나는 그녀에게 .. 2002. 11. 26.
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 - 김수영 어느날 古宮(고궁)을 나오면서 김수영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王宮(왕궁) 대신에 王宮(왕궁)의 음탕 대신에 五十(오십)원 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越南(월남)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二十(이십)원을 받으러 세번씩 네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 앞에 情緖(정서)로 가로놓여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의 포로수용소의 第十四野戰病院(제십사야전병원)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어스들과 스폰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경찰이 되지 않는다고 남자가 뭐 이런.. 2001. 12. 3.
절망 - 김수영 절망 김수영 풍경이 풍경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곰팡이 곰팡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여름이 여름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속도가 속도를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졸렬과 수치가 그들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바람은 딴데서 오고 구원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오고 절망은 끝까지 그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 김수영,'김수영 전집1-시',민음사, * tirol's thought 내 친구 종인이의 책꽂이에는 아마 이 시가 실려있는 '김수영 전집1-시'가 꽂혀있을 것이다. 그리고 물론 내 책꽂이에도. 사실 종인이에게 선물한 책은 원래 내가 보려고 샀던 책이었다. 그걸 종인이에게 선물하고 한참 뒤에 다시 똑같은 책을 샀다. 한번 내 손에 들어왔던, 그리고 머물렀던 책을 다시 산다는 일은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대학시.. 2001. 9.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