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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규4

개 발자국 - 김광규 개 발자국 김광규 온몸이 누런 털로 덮이고 슬픈 눈에 코끝이 까맣게 생긴 녀석. 뒤꼍 개집에서 봄여름 가을 나고, 겨울에는 차고 한구석에서 뒷발로 귀를 털면서 나이를 먹었지. 늘그막엔 주인집 거실 바닥에서 코를 골며 낮잠을 자기도 했다. 놈은 이 세상에 태어나 열여덟 해를 혼자 살았다. 물론 극진하게 보살펴주는 주인 내외와 딸이 있지만, 한마디로 말하자면 사고무친의 외톨이 아니었나. 천둥 벼락 치면서 폭우가 쏟아지는 날에는 놈이 위층 서재까지 뛰어 올라와 주인의 책상 아래 몸을 숨기기도 했다. 겁이 났던 모양이다. 놈을 야단치고 밖으로 쫓아내는 악역을 맡은 바깥주인도 이럴 때는 못 본 척 그대로 내버려두는 수밖에 없었다. 가족에 버금가는 대우를 해준 셈이었다. 이렇게 정든 놈이 몸뚱이만 남겨놓고 세상 틈.. 2023. 10. 8.
춘추 - 김광규 춘추 (春秋) 김광규 창밖에서 산수유 꽃 피는 소리 한 줄 쓴 다음 들린다고 할까 말까 망설이며 병술년 봄을 보냈다 힐끗 들여다본 아내는 허튼소리 말라는 눈치였다 물난리에 온 나라 시달리고 한 달 가까이 열대야 지새며 기나긴 여름 보내고 어느새 가을이 깊어갈 무렵 겨우 한 줄 더 보탰다 뒤뜰에서 후박나무 잎 지는 소리 * tirol's thought 3연 13행의 시 속에 봄부터 가을까지 세개의 계절이 들어있다. 망설임과 아내의 눈치와 물난리와 열대야를 거쳐 봄에서 가을로 꽃 피는 소리에서 잎 지는 소리로 잎 지는 소리와 다시 꽃피는 소리 사이에는 무엇이 있을까 2019. 6. 22.
생각의 사이 - 김광규 생각의 사이 김광규 시인은 오로지 시만을 생각하고 정치가는 오로지 정치만을 생각하고 경제인은 오로지 경제만을 생각하고 근로자는 오로지 노동만을 생각하고 법관은 오로지 법만을 생각하고 군인은 오로지 전쟁만을 생각하고 기사는 오로지 공장만을 생각하고 농민은 오로지 농사만을 생각하고 관리는 오로지 관청만을 생각하고 학자는 오로지 학문만을 생각한다면 이 세상이 낙원이 될 것 같지만 사실은 시와 정치의 사이 정치와 경제의 사이 경제와 노동의 사이 노동과 법의 사이 법과 전쟁의 사이 전쟁과 공장의 사이 공장과 농사의 사이 농사와 관청의 사이 관청과 학문의 사이를 생각하는 사람이 없으면 다만 휴지와 권력과 돈과 착취와 형무소와 폐허와 공해와 농약과 억압과 통계가 남을 뿐이다 * tirol's thought 아마도 이.. 2008. 7. 1.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 김광규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김광규 4·19가 나던 해 세밑 우리는 오후 다섯 시에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불도 없이 차가운 방에 앉아 하얀 입김 뿜으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정치와는 전혀 관계 없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 결론 없는 모임을 끝낸 밤 혜화동 로터리에서 대포를 마시며 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 문제 때문에 우리는 때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 아무도 귀기울이지 않는 노래를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노래를 저마다 목청껏 불렀다 돈을 받지 않고 부르는 노래는 겨울밤 하늘로 올라가 별똥별이 되어 떨어졌다 그로부터 18년 오랜만에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 되어 혁명이 두려운 기성 세대가 되어 넥타이를 매고 다시 모였다 회비를 만 원씩 걷고 처자식들의 안부를 나누고 월급.. 2001. 9.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