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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글판12

여름의 할일 - 김경인 여름의 할일 김경인 올여름은 내내 꿈꾸는 일 잎 넓은 나무엔 벗어놓은 허물들 매미 하나 매미 둘 매미 셋 남겨진 생각처럼 매달린 가볍고 투명하고 한껏 어두운 것 네가 다 빠져나간 다음에야 비로소 생겨나는 마음과 같은 올여름의 할일은 모르는 사람의 그늘을 읽는 일 느린 속도로 열리는 울음 한 송이 둥글고 오목한 돌의 표정을 한 천사가 뒹굴다 발에 채고 이제 빛을 거두어 땅 아래로 하나둘 걸어들어가니 그늘은 돌이 울기 좋은 곳 고통을 축복하기에 좋은 곳 올여름은 분노를 두꺼운 옷처럼 껴입을 것 한 용접공이 일생을 바친 세 개의 불꽃 하나는 지상의 어둠을 모아 가동되는 제철소 담금질한 강철을 탕탕 잇대 만든 길에, 다음은 무거운 장식풍의 모자를 쓴 낱말들 무너지려는 몸통을 꼿꼿이 세운 날카로운 온기의 뼈대에,.. 2021. 6. 19.
얼음새꽃 - 곽효환 얼음새꽃 곽효환 아직 잔설 그득한 겨울 골짜기 다시금 삭풍 불고 나무들 울다 꽁꽁 얼었던 샛강도 누군가 그리워 바닥부터 조금씩 물길을 열어 흐르고 눈과 얼음의 틈새를 뚫고 가장 먼저 밀어 올리는 생명의 경이 차디찬 계절의 끝을 온몸으로 지탱하는 가녀린 새순 마침내 노오란 꽃망울 머금어 터뜨리는 겨울 샛강, 절벽, 골짜기 바위틈의 들꽃, 들꽃들 저만치서 홀로 환하게 빛나는 그게 너였으면 좋겠다 아니 너다 * 곽효환 시집, 지도에 없는 집, 2010, 문학과지성사. * tirol's thought 교보 광화문 글판 겨울편으로 올라 온 시. 내 생각에 사실 이 시의 키는, 둘째연이다. '너였으면 좋겠다/ 아니 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다. 춥고, 외롭고, 힘들어도 믿음을.. 2010. 12. 30.
대추 한 알 - 장석주 대추 한 알 장석주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저게 저 혼자 둥글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저 안에 땡볕 두어 달 저 안에 초승달 몇 날 * tirol's thought 9월이 되었다. 교보글판 바뀌었다는 기사를 읽고 계절이 바뀌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느낀다. 돌아오는 토요일엔 벌초를 다녀오려고 한다. 시간은 무심히 홀로 흘러 저절로 계절은 바뀌어가지만 사람의 일에는 저절로, 저 혼자, 되는 일 없다. 노력하고, 참고, 감사하고, 기뻐할지어다. 2009. 9. 2.
약리도 - 조정권 약리도(躍鯉圖) 조정권 물고기야 뛰어 올라라 최초의 감동을 나는 붙잡겠다 물고기야 힘껏 뛰어 올라라 풀바닥 위에다가 나는 너를 메다치겠다 폭포 줄기 끌어내려 네 눈알을 매우 치겠다 매우 치겠다 * source: http://blog.naver.com/kyobogulpan/140069446750 * tirol's thought 2009년도 여름 교보글판에 올라온 시다. 뭔가 하나를 끈질기게 하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그러나 한편 끈질기게 뭔가를 하다보면 낱낱의 것들이 가질 수 없는 어떤 의미가 생겨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매년 생일에 사진을 한 장씩 찍는 일은 생각만큼 쉽지 않다. 하지만 매년 빼놓지 않고 생일에 사진 찍는 일을 50년쯤 한다고 하면 그 50장의 사진은 한 사람의 삶의 기록을 넘어서는.. 2009. 6. 26.
하루에 얼마나 많은 일들이 일어나는가 - 파블로 네루다 하루에 얼마나 많은 일들이 일어나는가 파블로 네루다 하루가 지나면 우린 만날 것이다. 그러나 하루 동안 사물들은 자라고, 거리에선 포도가 팔리며, 토마토 껍질이 변한다. 또 네가 좋아하던 소녀는 다시는 사무실로 돌아오지 않았다. 사람들이 갑자기 우체부를 바꿔버렸다. 이제 편지는 예전의 그 편지가 아니다. 몇 개의 황금빛 잎사귀, 다른 나무다. 이 나무는 이제 넉넉한 나무다. 옛 껍질을 그대로 지니고 있는 대지가 그토록 변한다고 누가 우리에게 말해주랴? 대지는 어제보다 더 많은 화산을 가졌고, 하늘은 새로운 구름들을 가지고 있다. 또 강물은 어제와 다르게 흐른다. 또, 얼마나 많은 것들이 건설되는가! 나는 도로와 건물들, 배나 바이올린처럼 맑고 긴 교량의 낙성식에 수없이 참석했다. 그러므로 내가 너에게 인.. 2008. 3. 11.
단풍 드는 날 - 도종환 단풍 드는 날 도종환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아는 순간부터 나무는 가장 아름답게 불탄다 제 삶의 이유였던 것 제 몸의 전부였던 것 아낌없이 버리기로 결심하면서 나무는 생의 절정에 선다 방하착(放下着) 제가 키워온, 그러나 이제는 무거워진 제 몸 하나씩 내려놓으면서 가장 황홀한 빛깔로 우리도 물이 드는 날 / 도종환 시집,슬픔의 뿌리, 실천문학사, 2005년 10월/ * tirol's thought 내 친구 종인이가 이번 가을 교보글판의 글로 올라왔다고 알려준 시다. 나는 아직 '아름답게 불탈' 때가 안되었는지 뭘 버려야 할지도 모르겠고 내 삶의 이유에 대해서도 확신이 서지 않는다. 동물원의 노래 가사처럼 여전히 '어딘가 있을 무언가를 아직 찾고' 있는 중. 그래도, 뭐, 가을에 읽기에는 나쁘지 않은 시.. 2007. 9.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