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물결 하나 - 나희덕
저 물결 하나
나희덕
한강 철교를 건너는 동안
잔물결이 새삼스레 눈에 들어왔다
얼마 안 되는 보증금을 빼서 서울을 떠난 후
낯선 눈으로 바라보는 한강,
어제의 내가 그 강물에 뒤척이고 있었다
한 뼘쯤 솟았다 내려앉는 물결들,
서울에 사는 동안 내게 지분이 있었다면
저 물결 하나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결, 일으켜
물새 같은 아이 둘을 업어 길렀다
사랑도 물결, 처럼
사소하게 일었다 스러지곤 했다
더는 걸을 수 없는 무릎을 일으켜 세운 것도
저 낮은 물결, 위에서였다
숱한 목숨들이 일렁이며 흘러가는 이 도시에서
뒤척이며, 뒤척이며, 그러나
같은 자리로 내려앉는 법이 없는
저 물결, 위에 쌓았다 허문 날들이 있었다
거대한 점묘화 같은 서울
물결, 하나가 반짝이며 내게 말을 건넨다
저 물결을 일으켜 또 어디로 갈 것인가
<나희덕, 사라진 손바닥, 문학과지성사, 2004>
tirol's thought
서울 시내가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남산이나 북악스카이웨이 같은 곳에 가면
나도 모르게 나오는 말.
'서울에 저렇게 집이 많은데, 우리집은...'
이사다니는 건 힘들다.
아내가 아끼는 가구의 모퉁이가 부서지고,
오디오 케이블이 사라지고,
그때 그 물건이 어디 있는지 찾기 위해 이곳 저곳을 열어봐야 한다.
하긴 써놓고 보니 이런 어려움을 어려움이라고 말해야 할지 머뭇거리게 된다.
'더는 걸을 수 없는 무릎을 일으켜 세우며' 이사를 다닌
시인의 숨겨진 이야기에 비춰보면 이쯤의 불편이 무슨 대수랴.
오래 전, 어린 나와 동생을 데리고 이사를 하면서
어머니가 느꼈을 고단함이 떠올라 마음이 아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