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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어주는 남자

처음엔 당신의 착한 구두를 사랑했습니다 - 성미정

by tirol 2006. 5. 9.
처음엔 당신의 착한 구두를 사랑했습니다

성미정


처음엔 당신의 착한 구두를 사랑했습니다
그러다 그 안에 숨겨진 발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다리도 발 못지않게 사랑스럽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당신의 머리까지
그 머리를 감싼 곱슬머리까지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당신은 저의 어디부터 시작했나요
삐딱하게 눌러쓴 모자였나요
약간 휘어진 새끼손가락이었나요
지금 당신은 저의 어디까지 사랑하나요
몇 번째 발가락에 이르렀나요
혹시 제 가슴에만 머물러 있는 건 아닌가요
대답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그러했듯이
당신도 언젠가 모든 걸 사랑하게 될 테니까요

구두에서 머리카락까지 모두 사랑한다면
당신에 대한 저의 사랑은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것 아니냐고요
이제 끝난 게 아니냐고요 아닙니다
처음엔 당신의 구두를 사랑했습니다
이제는 당신의 구두가 가는 곳과
손길이 닿는 곳을 사랑하기 시작합니다
언제나 시작입니다


* tirol's thought

어떻게 사랑하게 되었냐는 질문은
왜 사랑하느냐는 질문만큼 어리석다.
닭과 달걀의 이야기처럼
사랑은 그 시작을 가늠하기 어렵다.
착한 구두때문에 사랑에 빠진 것인지
사랑에 빠졌기 때문에 착한 구두가 눈에 들어오는 것인지
누가 딱 잘라 얘기할 수 있을까.
하지만 사랑에 빠진다는 것이 어떠한 의미인지
어떻게 사랑에 빠지게 되는 것인지에 대한 다양한 이론에 앞서
중요한 것은 사랑에 빠진다는 그 사실 자체이다.
우리가 음식물의 세세한 성분과 소화과정의 복잡한 이론을 몰라도
밥을 먹을 수 있고,
매일 같이 밥을 먹고 있고,
밥을 먹어야 살 수 있다는 사실이 변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