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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어주는 남자

절망 - 김수영

by tirol 2001. 9. 16.
절망

김수영


풍경이 풍경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곰팡이 곰팡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여름이 여름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속도가 속도를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졸렬과 수치가 그들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바람은 딴데서 오고
구원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오고
절망은 끝까지 그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

김수영,'김수영 전집1-시',민음사,


* tirol's thought

내 친구 종인이의 책꽂이에는 아마 이 시가 실려있는 '김수영 전집1-시'가 꽂혀있을 것이다. 그리고 물론 내 책꽂이에도. 사실 종인이에게 선물한 책은 원래 내가 보려고 샀던 책이었다. 그걸 종인이에게 선물하고 한참 뒤에 다시 똑같은 책을 샀다. 한번 내 손에 들어왔던, 그리고 머물렀던 책을 다시 산다는 일은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대학시절, 가방 속에 넣어다니던 시집을 술 기운에 누군가에게 줘 버리고 난 뒤, 술이 깨면 똑 같은 시집을 다시 살 것인가 말 것인가로 고민하곤 했다. 실제로 어떤 건 다시 사고 후회한 경우도 있다. 다시는 들여다 보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김수영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후회하지 않는다. 난, 김수영의 유머가 참 마음에 든다. 그리고 전집의 앞에 실린 광대뼈가 유난히 두드러져 보이는 깡마른 그의 얼굴 사진을 좋아한다. 그의 친구 박인환과 얽힌 이야기를 읽는 일도 즐겁고, 그가 서울의 일을 작파하고 근교 어딘가에서 양계장을 했었다는 사실도 재미있다.
'끝까지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 절망'은 진정한 존재의 끝인가? '반성할 수 있는 절망은 진정한 절망이 아니다.' 나는 이 구절을 이렇게 읽는다. 아니, 그것은 희망일지도 모른다. 스스로를 돌아다 보는 절망. 반성하는 절망. 희망의 다른 이름. 게다가 '구원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온다'고 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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