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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어주는 남자

울고 있는 가수 - 허수경

by tirol 2001. 9. 16.
울고 있는 가수

허수경


가수는 노래하고 세월은 흐른다
사랑아, 가끔 날 위해 울 수 있었니
그러나 울 수 있었던 날들의 따뜻함
나도 한때 하릴없이 죽지는 않겠다,
아무도 살지 않는 집 돌담에 기대
햇살처럼 번진 적도 있었다네
맹세는 따뜻함처럼 우리를 배반했으나
우는 철새의 애처러움
우우 애처러움을 타는 마음들
우우 마음들 가여워라
마음을 빠져나온 마음이 마음에게로 가기 위해
설명할 수 없는 세상의 일들은 나를 울게 한다
울 수 있음의 따뜻했음
사랑아, 너도 젖었니
감추어두었던 단 하나, 그리움의 입구도 젖었니
잃어버린 사랑조차 나를 떠난다
무정하니 세월아,
저 사랑의 찬가


허수경 시집 '혼자 가는 먼집' (문학과 지성사, 1992)

* tirol's thought

지금 허수경은 서울에 없다. 독일 어딘가에서 문화인류학을 공부하고 있다는 이야길 들었다. 하긴 돌아왔을지도 모르지. 그녀의 소재를 알게 되었던건 몇 년전 어느 문학계간지에서 그녀가 쓴 소설을 마지막으로 읽었던 때니까...하긴 그녀가 어디있든 그게 나에게 어떤 의미를 가진단 말인가? 무의미한 앎, 덧없는 고민, 그리고 이유없는 눈물. 허수경의 시에는 눈물이 배어있지만 차갑지 않다. 허무한 면이 있지만 또 그런게 삶의 한 얼굴이겠거니, 하고 수긍이 가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가수는 노래하고 세월은 흐른다'라는 대목이 나는 이유없이 좋다. 여기서 가수, 라고 할 때 나는 주로 죽은 가수 - 배호, 김현식, 김광석 -를 떠올리게 되는 데 왜 그런지 모르겠다. 세월이란 말때문일까? 얼마전 본 JSA라는 영화에서 북한군으로 나온 송강호가 "광석이는 왜 그리 일찍죽어가지구서는..."이라는 얘기를 하던 장면(그리고 그걸 핑계로 술...)이 기억난다. 그래, 광석이는 왜 그리 일찍 죽어가지구서, 그리구 수경이는 왜 이런 시를 써가지구서 나를 눈물짓게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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