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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어주는 남자

어떤 일생 - 천양희

by tirol 2005. 6. 17.
어떤 일생

천양희


부판(蝜蝂)이라는 벌레가 있다는데 이 벌레는 짐을 지고
다니는 것을 좋아한다는데 무엇이든 등에 지려고 한다는데 무거운
짐 때문에 더 이상 걸을 수 없을 때 짐을 내려주면 다시 일어나
또 다른 짐을 진다는데 짐지고 높이 올라가는 것을 좋아한다는데
평생 짐만 지고 올라간다는데 올라가다 떨어져 죽는다는데

히스테리아 시베리아나라는 병이 있는데 이 병은 시베리아
농부들이 걸리는 병이라는데 날마다 똑같은 일을 반복하다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때 곡괭이를 팽개치고 지평선을 향해
서쪽으로 서쪽으로 걸어간다는데 걸어가다 어느 순간 걸음을
뚝, 멈춘다는데 걸음을 멈춘 순간 밭고랑에 쓰러져 죽는다는데

오르다 말고 걸어가다 마는 어떤 일생


/천양희 시집, 너무 많은 입, 창비, 2005/


* tirol's thought

짐지고 높이 올라가는 것을 좋아하지도 않고, 견딜 수 없을만큼 날마다 똑같은 일을 반복하는 것도 아니지만(그런가? 가끔은 나도 곡괭이를 팽개치고 싶기는 하다.) 나도 어느날인가, 오르다가 말고, 걸어가다가 말고 죽게 되겠지. 완결된 인생이 어디 그리 흔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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