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 읽어주는 남자

어느 맑고 추운 날 - 박정대

by tirol 2002. 11. 5.
어느 맑고 추운 날

박정대


이제는 쓰지 않는 오래된 옹기 위에
옥잠화가 심어진 토분을 올려놓아 보네
맑은 가을 하늘 어딘가에
투명한 여섯 줄의 현이 있을 것만 같은 오후
생각해보면, 나를 스쳐간 사랑은 모두
너무나 짧은 것들이어서
옹골찬 옹기 같은 내 사랑은
왜 나에게 와서 머물지 않았던 것인가
안타까워지는 이 오후에
햇살과 바람이 연주하는
내 기타 소리는 너무나 낡고 초라하지만
나는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슬리퍼를 직직 끌며
온몸으로 그대에게로 가네
이제는 떠나지 못하게
오래된 옹기 위에 묵직한 토분을 올려놓으며
정성스레 물을 주고 있네
그대는 옹기, 나는 토분
이렇게 우리 옹기종기 모여
추운 한 시절 견디며
킬킬대고 있네
햇살 두툼한 오후를 껴입고 나와 앉아
옹기 위에 토분을 올려 놓으며, 근사하다고
우리의 삶도 이만큼 근사해졌다고


* tirol's thought

"나를 스쳐간 사랑은 모두/너무나 짧은 것들이어서/옹골찬 옹기 같은 내 사랑은/왜 나에게 와서 머물지 않았던 것인가"

사랑은 이런거다, 결혼은 저런거다,
나에게 얘기하지 마라.
그리고 기억해다오.
그대들은 나를 볼 때
가끔 답답하겠지만,
늘, 가장, 답답하고, 안타깝고, 괴로운 사람은
바로 나다.

'시 읽어주는 남자'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빈 마당을 볼 때마다 - 장석남  (0) 2002.11.08
엄마 걱정 - 기형도  (0) 2002.11.07
사람들은 왜 모를까 - 김용택  (0) 2002.06.24
흰 바람벽이 있어 - 백석  (0) 2002.05.13
할머니 편지 - 이동진  (0) 2002.0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