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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어주는 남자

성탄제 - 김종길

by tirol 2001. 12. 24.
성탄제(聖誕祭)

김종길


어두운 방 안엔
바알간 숯불이 피고,

외로이 늙으신 할머니가
애처로이 잦아드는 어린 목숨을 지키고 계시었다.

이윽고 눈 속을
아버지가 약(藥)을 가지고 돌아오시었다.

아, 아버지가 눈을 헤치고 따 오신
그 붉은 산수유(山茱萸) 열매 -

나는 한 마리 어린 짐승,
젊은 아버지의 서늘한 옷자락에
열(熱)로 상기한 볼을 말없이 부비는 것이었다.

이따금 뒷문을 눈이 치고 있었다.
그 날 밤이 어쩌면 성탄제(聖誕祭)의 밤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느 새 나도
그때의 아버지만큼 나이를 먹었다.

옛 것이란 거의 찾아볼 길 없는
성탄제(聖誕祭) 가까운 도시에는
이제 반가운 그 옛날의 것이 내리는데,

서러운 서른 살 나의 이마에
불현듯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을 느끼는것은,

눈 속에 따오신 산수유(山茱萸) 붉은 알알이
아직도 내 혈액(血液) 속에 녹아 흐르는 까닭일까.


* tirol's thought

대학때 김종길 선생님께 영미시개설을 들었다. 성적은? 낙제했다. 그리고 김우창 선생님께 재수강했다. 그 성적은? 묻지마라. 괴롭다. 그렇지만 난 두분 선생님께 들은 영미시개설이 대학시절 들었던 어떤 수업보다 기억에 많이 남는다.
김종길 선생님은 수업시간 내내 언제나 똑바로 서서 수업을 하셨다. 책상 사이의 통로를 천천히 걸으시면서 까랑까랑한 목소리로 영시를 읽어주셨다. 그리고 우리 학번(89학번)이 유난히 공부를 안한다고 타박도 많이 하셨다.
시험도 가장 늦게 보았다.(사실 내가 김종길 선생님의 수업에 낙제한 이유는 기말 시험을 보지 않고 그냥 집에 내려갔기 때문이다. 중간 고사를 워낙 망쳐서...아무리 기말고사를 잘 봐도 별 희망이 없다는 핑계로...실제로 기말고사를 본 내 친구들 거의 대부분이 C나 D였다.)

그때가 벌써 10년 전.
벌써 '옛것이란 거의 찾아볼 길 없는'
얼마전 찾았던 학교 앞을 떠올리며 맞이하는 성탄.
서러운 서른 두살 나의 이마에
불현듯 옛 추억의 서느런 옷자락을 느끼는것은,
무엇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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