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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어주는 남자

서랍에 대하여 - 나희덕

by tirol 2005. 6. 15.
서랍에 대하여

나희덕


서랍을 열고 나면
무엇을 찾으려 했었나 기억나지 않는다
서랍을 닫고 나면
서랍 안에 무엇이 있었나 기억나지 않는다
서랍은 하나의 담이다
감싸고 품어내는 것, 그보다
더 넓은 세상에 등을 돌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의 그리움은
서랍 안에 저녁햇살처럼 누워 있고
그 그늘 속에 누추한 벌레 몇 마리
어떻게 잠이 드는지 볼 수조차 없다
사람이 입을 내밀고 웃고 있을 때
닳고 닳은 입술 사이로
무슨 말인가 건네려 할 때
나는 담을 넘듯이
영혼의 서랍을 열어본다

/나희덕 시집, 뿌리에게, 창비,1991/


* tirol's thought

어제는 퇴근 길에 지난 금요일에 함께 마시고 흠씬 취했던 친구 녀석들에게 차례로 전화를 해 봤다. M, K, K, P, N, 전화를 받지 않은 L을 제외하고 한 놈도 빠짐없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물론 나도 소주를 한 두병쯤 마시고 들어가는 길이었다.(술을 안마셨으면 전화할 생각도 안했을 것이다.) 하긴 어젠 비도 왔고, 화요일이고, 마시지 말아야할 이유도 없다.

술을 마시다 보면 왜 술을 마시게 되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술을 마시고 나면 어떻게 술을 마셨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술도 하나의 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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