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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어주는 남자

사랑니 - 고두현

by tirol 2007. 11. 5.
사랑니

고두현


슬픔도 오래되면 힘이 되는지
세상 너무 환하고 기다림 속절없어
이제 더는 못 참겠네.
온몸 붉디붉게 애만 타다가
그리운 옷가지들 모두 다 벗고
하얗게 뼈가 되어 그대에게로 가네.
생애 가장 단단한 모습으로
그대 빈 곳 비집고 서면
미나리밭 논둑길 가득
펄럭이던 봄볕 어지러워라.

철마다 잇몸 속에서 가슴 치던 그 슬픔들
오래되면 힘이 되는지
내게 남은 마지막 희망
빛나는 뼈로 솟아 한밤내 그대 안에서
꿈같은 몸살 앓다가
끝내는 뿌리째 사정없이 뽑히리라는 것
내 알지만 햇살 너무 따뜻하고
장다리꽃 저리 눈부셔 이제 더는
말문 못 참고 나 그대에게로 가네

/고두현, 늦게 온 소포  민음의 시 097, 민음사, 2000년 08월/

* source: 시인학교 좋은 시집 게시판

* tirol's thought

비장하다.
'끝내는 뿌리째 사정없이 뽑히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갈 수 밖에 없는 길.
오래된 슬픔의 힘이 밀어올리는 사랑니 같은 희망.
그에 비하면 내 삶은 얼마나 푸석푸석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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