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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어주는 남자

베드로 1 - 조정권

by tirol 2005. 6. 8.
베드로 1

조정권


컴컴한 하늘에서
드럼통 터지는 소리 들리고
거리에는
콜타르 같은 빗물이
흘러 넘쳤다
베드로는 저도 모르게
땅바닥에 떨어뜨린 생선을
다시 주워 안았다
바야흐로
탱크 같은 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거대한 果物이
도시의 골목 골목에서
굵은 땀방울들을 체포하고 있었다
그는 닭이 울기 전에 세 번 부정했다
베드로는 점령지구로 나아가
입과 눈을
반납했다
평생을
바다에서 늙을 작정이었다
베드로는 이제 중년이 되었고
머리도 벗겨졌다
그동안 자식새끼와 마누라까지 두었다
인간이란 태어나면서
등허리에 과녁판을 짊어지고
태어난다는 사실
자식새끼와 마누라에게도
어김없이 창끝이 휘뚝 날아간다는
이 넌더리 나는 상식
그는 상식을 존중하기 위해
오늘도 더 멀리 바다로 나간다
그의 소원은 부둣가에 차려놓은 어물전이
더욱 번창하기를 기대하는 것뿐이다

/조정권 시집, 얼음들의 거주지, 미래사, 1991/


* tirol's thoguht

내가 아는 베드로는 순정한 인간이다. 그는 첫사랑에 빠진 소년처럼 투박한 열정으로 예수를 사랑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사랑했던 예수를 잃고, 사람들 앞에서 하룻밤 새 세번이나 예수를 부인한 후 울며 고향마을로 돌아간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버리고 좇았던 구원의 빛을 잃어버린 사나이의 절망은 '점령지구로 나아가/입과 눈을/반납'하고 '평생을/바다에서 늙을 작정'을 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는 기적을 맛본 자였다. 예수와 함께 한 삼년여의 세월 동안 그는 빵 다섯 덩어리와 물고기 두마리로 오천명의 사람들을 먹이는 기적을 보았고, 죽은 나사로를 살리는 기적도 보았고, 자신이 물 위를 걷는 기적을 경험했다.
그런 그가 '넌더리 나는 상식/...상식을 존중하기 위해/오늘도 더 멀리 바다로 나간다.' 부활하신 예수가 그를 다시 찾지 않았더라면 그는 영영 '부둣가에 차려놓은 어물전이/더욱 번창하기를 기대하는 것'만을 소원으로 가진 채 쓸쓸히 늙어갔을 것이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등허리에 과녁판을 짊어지'고 있으며 '자식새끼와 마누라에게도/ 어김없이 창끝이 휘뚝 날아간다'는 상식 앞에 평생을 바치기로 작정하는 베드로의 모습은 기적을 경험했던 그의 모습과 눈물겹게 대비된다.
이 시의 밖에 있는 이야기지만 기적은 다시 찾아왔다. 베드로는 상식을 버리고 구원의 길을 좇았다.상식과 구원 사이에는 무엇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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