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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어주는 남자

늙어가는 아내에게 - 황지우

by tirol 2001. 9. 16.
늙어가는 아내에게

황지우


내가 말했잖아
정말, 정말, 사랑하는 사람들,
사랑하는 사람들은
너, 나 사랑해?
묻질 않어
그냥, 그래
그냥 살어
그냥 서로를 사는게야
말하지 않고, 확인하려 하지 않고,
그냥 그대 눈에 낀 눈꼽을 훔치거나
그대 옷깃의 솔밥을 뜯어주게 싶게 유난히 커보이는 거야
생각나?
지금으로부터 14년전, 늦가을
낡은 목조 적산 가옥이 많던 동네의 어둑어둑한 기슭,
높은 축대가 있었고, 흐린 가로등이 있었고
그 너머 잎 내리는 잡목 숲이 있었고
그대의 집, 대문 앞에선
이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바람이 불었고
머리카닥보다 더 가벼운 젊음을 만나고 들어가는 그대는
내 어깨 위의 비듬을 털어주었지
그런 거야, 서로를 오래오래 그냥, 보게 하는 거
그리고 내가 많이 아프던 날
그대가 와서, 참으로 하기 힘든, 그러나 속에서는
몇 날 밤을 잠 못 자고 단련시켰던 뜨거운 말:
저도 형과 같이 그 병에 걸리고 싶어요.

그대의 그 말은 에탐부톨과 스트렙토마이신을 한알한알
들어내고 적갈색의 빈 병을 환하게 했었지
아, 그 곳은 비어있는 만큼 그대 마음이었지
너무나 벅차 그 말을 사용할 수조차 없게 하는 그 사람은
아픔을 낫게 하기보다는, 정신없이,
아픔을 함께 앓고 싶어하는 것임을
한밤, 약병을 쥐고 울어버린 나는 알았지
그래서,그래서, 내가 살아가야 할 이유가 된 그대는 차츰
내가 살아갈 미래와 교대되었고


이제는 세월이라고 불러도 될 기간을 우리는 함께 통과했다
살았다는 말이 온갖 경력의 주름을 늘리는 일이듯
세월은 넥타이를 여며주는 그대 손 끝에 역력하다
이제 내가 할 일은 아침 머리맡에 떨어진 그대 머리카락을
침묻힌 손으로 짚어내는 일이 아니라
그대와 더불어, 최선을 다해 늙는 일이리라
우리가 그렇게 잘 늙은 다음
힘없는 소리로, 임자, 우리 괜찮았지?
라고 말할 수 있을 때, 그때나 가서
그대를 사랑한다는 말은 그때나 가서
할 수 있는 말일 거야.


* tirol's thought

사랑이란 정말 20대에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닌지도 모르겠다. "그냥 서로를 사는 일" 그리고 아주 나중에, "그때나 가서 할 수 있는 말" 그게 진짜 사랑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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