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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시를 쓰는 남자

이기철


바람타는 나무 아래서 온종일 정물이 되어 서 있는 남자
정물이 되지 않기 위해 새들은 하늘로 날아오르고
무너진 건물 사이에서 고전적인 늑골을 들고 서 있는 남자
벽돌집 한 채를 사기에는 형편없이 부족한 시를
밤 늦게까지 쓰고 있는 남자
아파트 건너집 주인 이름을 모르는 남자
담요 위에 누워서도 별을 헤는
백리 밖 강물 소릴 듣는 남자
징검다리를 건너면서 개울물에 발이 빠진 남자
주식시세와 온라인 계좌를 못 외는 남자
가슴 속에 늘 수선화같은 근심 한 가닥 끼고 다니는 남자
장미가시에 찔려 죽을 남자
거미줄 같은 그리움 몇 올 바지춤에 차고 다니는 남자
민중시도 동서기도 되기에는 부적합한 남자
활자 보면 즐겁고 햇살보면 슬퍼지는 남자
한 아내를 부채로만 살아가는 남자
가을강에 잠긴 산그늘 같은 남자
버려진 빈 술병같은, 지푸라기 같은 남자
서정시를 쓰는 남자


* tirol's thought

시를 읽으며 제일 먼저 떠오른 건,
'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한 잎같이 쬐끄만 여자'로 시작하는 오규원의 '한 잎의 여자'.
그리고 다음으론 나는 몇가지나 해당될까.
마지막으로 여자들은 이런 남자를 어떻게 생각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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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프로필사진 꿀풀 놀러와~ 2005.03.23 18:29
  • 프로필사진 그때그넘 은희경의 '짐작과는 다른 일들' 이라는 단편에 약간 비슷한 상황이 묘사되기도 하는데 저에겐 그 부분이 가끔 생각나곤 합니다.




    어쨌든

    늘 감사합니다. 뭐,... 어떤 의미로든. ^^
    2005.03.25 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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