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 읽어주는 남자472

그 깃발, 서럽게 펄럭이는 - 박정대 그 깃발, 서럽게 펄럭이는 박정대 기억의 동편 기슭에서 그녀가 빨래를 널고 있네, 하얀 빤스 한 장 기억의 빨랫줄에 걸려 함께 허공에서 펄럭이는 낡은 집 한 채 조심성 없는 바람은 창문을 마구 흔들고 가네, 그 옥탑방 사랑을 하기엔 다소 좁았어도 그 위로 펼쳐진 여름이 외상장부처럼 펄럭이던 눈부신 하늘이, 외려 맑아서 우리는 삶에, 아름다운 그녀에게 즐겁게 외상지며 살았었는데 내가 외상졌던 그녀의 입술 해변처럼 부드러웠던 그녀의 허리 걸어 들어갈수록 자꾸만 길을 잃던 밤이면 달빛은 활처럼 내 온몸으로 쏟아지고 그녀의 목소리는 리라 소리처럼 아름답게 들려왔건만 내가 외상졌던 그 세월은 어느 시간의 뒷골목에 그녀를 한 잎의 여자로 감춰두고 있는지 옥타비오 빠스를 읽다가 문득 서러워지는 행간의 오후 조심성 없.. 2004. 11. 19.
아줌마가 된 소녀를 위하여 - 김기택 아줌마가 된 소녀를 위하여 김기택 마흔이 넘은 중년의 여자는 아직도 나를 오빠라고 불렀다 오빠, 옛날하고 똑 같다! 오빠, 신문에서 봤어. 시집도 읽었어. 두 권이나! 얼굴은 낯설었으나 웃음은 낯익었다. 그녀가 웃을 때마다 옛날에 보았던 소녀가 중년의 얼굴에서 뛰어나왔다. 작고 어린 네가 다리 사이에 털도 나고 브레지어도 차는 크고 슬픈 몸이 되었구나 네 가녀린 몸을 찢고 엄마보다 큰 고등학생 딸과 중학생 아들들이 나왔구나 오랜 세월은 남편이 되고 아이들이 되어 네 몸에 단단히 들러붙어 마음껏 진을 빼고 할퀴고 헝클어뜨려 놓았구나. 30년 전의 얼굴을 채 익히기도 전에 엄마와 아내를 찾는 식구들이 쳐들어오자 소녀는 얼른 웃음을 거두고 중년의 얼굴로 돌아갔다 오빠, 갈게. 손 흔들며 맑게 웃을 때 잠깐 보.. 2004. 11. 17.
새들은 모래주머니를 품고 난다 - 손택수 새들은 모래주머니를 품고 난다 손택수 난다는 것은 목구멍이 쓰라린 일이다. 쓰라림을 참고, 목구멍에 굳은살 박이는 일이다. 새들은 날기 위해, 날 수 있는 적정체중을 유지하기 위해 제 이빨을 모두 뽑아버린 자들이 아닐까. 새들은 시합을 앞둔 복서처럼 모래주머니를 달고 다닌다. 이빨 대신 먹이를 잘게 부수면서 채워놓아야 하는 모래주머니를 아주 몸속에 집어넣고 다닌다. 아무도 떼갈 수 없게끔, 실은 고비고비마다 흔들리는 자신을 더 경계하며, 우리는 더러 모래 씹듯 밥을 삼키지만 새들은 매 끼니마다 모래를 삼키고 있는 것이다. * tirol's thought 하늘을 날지는 못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사람들에게도 몸 속에 모래주머니가 하나씩 생긴다. 누구에게도 얘기하지 못하는 슬픔들. 묵묵히 밥을 씹듯 혼자 넘겨야.. 2004. 11. 15.
빗방울,빗방울 - 나희덕 빗방울,빗방울 나희덕 버스가 달리는 동안 비는 사선이다 세상에 대한 어긋남을 이토록 경쾌하게 보여주는 유리창 어긋남이 멈추는 순간부터 비는 수직으로 흘러내린다 사선을 삼키면서 굵어지고 무거워지는 빗물 흘러내리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더이상 흘러갈 곳이 없으면 빗물은 창틀에 고여 출렁거린다 출렁거리는 수평선 가끔은 엎질러지기도 하면서 빗물, 다시 사선이다 어둠이 그걸 받아 삼킨다 순간 사선 위에 깃드는 그 바람, 그 빛, 그 가벼움, 그 망설임 뛰어내리는 것들의 비애가 사선을 만든다 Tracked from http://puha.onblog.com/blog/blog_post_list.jsp?owner_uid=16941&cur_page=1&category=5596&now_date=&post_uid=-1 * t.. 2004. 11. 11.
정기구독 목록 - 최갑수 정기구독 목록 최갑수 나의 정기구독 목록에는 늦은 밤 창가를 스치는 빗소리와 그 빗소리를 들으며 슬쩍슬쩍 읽어보는 윤동주 백석 박용래 같은 눈물을 닮은 이름 몇 자들 새벽녘 앞마당에 고여 있는 막 떠다놓은 찻물처럼 말갛기만 한 하늘 기다릴 필요 없어요, 바람난 애인이 또박또박 적어준 빛이 바랜 하늘색 편지 읍내에서 단 하나뿐인 중앙극장의 야릇하게 생긴 배우들 그 배우들이 슬픈 얼굴로 보여주는 화끈한 '오늘 푸로' 환절기마다 잊지 않고 찾아오는 사나흘간의 감기 그때마다 먹는 빨갛고 노란 알약들, 일요일 담에 널어 말리는 초록색 담요와 그 담요를 말고 자는 둥그스름한 낮잠 그 낮잠 위로 헬리콥터가 한 대 가끔 부르르르 저공 비행을 하다가 돌아가기도 하고 내 낮잠도 부르르르 따라 흔들리기도 하고 낮잠에서 깨어.. 2004. 11. 10.
똥구멍으로 시를 읽다 - 고영민 똥구멍으로 시를 읽다 고영민 겨울산을 오르다 갑자기 똥이 마려워 배낭 속 휴지를 찾으니 없다 휴지가 될만한 종이라곤 들고 온 신작시집 한권이 전부 다른 계절 같으면 잎새가 지천의 휴지이련만 그런 궁여지책도 이 계절의 산은 허락치 않는다 할 수 없이 들려 온 시집의 낱장을 무례하게도 찢는다 무릎까지 바지를 내리고 산중턱에 걸터앉아 그분의 시를 정성껏 읽는다 읽은 시를 천천히 손아귀로 구긴다 구기고, 구기고, 구긴다 이 낱장의 종이가 한 시인을 버리고, 한권 시집을 버리고, 자신이 시였음을 버리고 머물던 자신의 페이지마저 버려 온전히 한 장 휴지일 때까지 무참히 구기고, 구기고, 구긴다 펼쳐보니 나를 훑고 지나가도 아프지 않을 만큼 결이 부들부들해져 있다 한 장 종이가 내 밑을 천천히 지나간다 아, 부드럽게.. 2004. 11.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