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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어주는 남자472

첫사랑 - 심재휘 첫사랑 심재휘 장충동에 비가 온다 꽃잎들이 서둘러 지던 그날 그녀와 함께 뛰어든 태극당 문 앞에서 비를 그으며 담배를 빼물었지만 예감처럼 자꾸만 성냥은 엇나가기만 하고 샴푸향기 잊혀지듯 그렇게 세월은 갔다 여름은 대체로 견딜 만하였는데 여름 위에 여름 또 여름 새로운 듯 새롭지 않게 여름 오면 급히 비를 피해 내 한 몸 겨우 가릴 때마다 비에 젖은 성냥갑만 늘었다 그래도 훨씬 많은 것은 비가 오지 않은 날들이었고 나뭇가지들은 가늘어지는 운명을 향해 걸어갔다 가늘어지기는 여름날 저녁의 비도 마찬가지였지만 그 후로 많은 저녁들이 나를 지나갔지만 발아래 쌓인 세월은 귀갓길의 느린 걸음에도 낡은 간판처럼 가끔 벗겨지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면 마른 꽃잎에게 묻는 안부처럼 들춰 보는 그 여름 저녁에는 여전히 버스만 .. 2021. 4. 18.
윤사월 - 박목월 윤사월(閏四月) 박목월 송홧(松花)가루 날리는 외딴 봉우리 윤사월 해 길다 꾀꼬리 울면 산직이 외딴 집 눈먼 처녀사 문설주에 귀 대이고 엿듣고 있다 tirol's thought 계절마다 나도 모르게 떠올리게 되는 시가 있다. 해마다 어느 가을 저녁이 되면 문득 김춘수의 '가을 저녁의 시'가 생각나고, 해마다 어느 봄날이면 문득 이 시를 떠올리고, 중얼거린다. '송홧가루 날리는/ 외딴 봉우리'... 이 시는 시인이 1946년 5월, 문예지 '상아탑'에 처음 발표했다고 하는데, 윤사월이 들었던 해를 찾아보니 1946년에는 윤달이 없었고 1944년에 윤사월이 있었다. 시인의 경험을 기초로 두어해 전 써두었던 시를 1946년에 발표한 것이거나 아니면 상상으로 쓴 것이리라. 내 짐작으로는 윤사월이 들었던 1944.. 2021. 4. 11.
줌을 이용한 시 낭송회를 열었습니다 어제 (2/21, 토) 저녁에 줌을 이용해서 시 낭송회를 열었습니다. 저를 빼고 7분이 참여해 주셨고 저녁 8시부터 시작해서 9시 반까지 한 시간 반 가량 진행되었습니다. 시 낭송회를 열겠다고 얘기를 해놓고 '이걸 어떻게 해야하나? 참여할 사람은 있을까? 무슨 얘기를 하지?' 걱정만 한 가득이었는데, '무사히'(!) 잘 마쳤습니다. 30분 정도 돌아가면서 자기 소개를 하고 이어서 각자 준비해 온 시를 읽었습니다. 눈으로만 읽던 시를 소리내어 읽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근사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 자기의 색깔대로 낭송하는 시는 활자로 보는 시와는 전혀 다르게 느껴지더군요. 시 낭송을 들은 다음에는 좋았던 점이나 느낀 점, 또 시와 관련한 이런저런 얘기들을 나눴습니다. 그렇게 순서를 진행하다 보니 한 시간.. 2021. 2. 21.
統營 - 백석 統營 백석 녯날에 統制使가 있었다는 낡은 港口의 처녀들에겐 녯날이 가지 않은 千姬라는 이름이 많다 미역오리같이 말라서 굴껍지처럼 말없이 사랑하다 죽는다는 이 千姬의 하나를 나는 어늬 오랜 客主집의 생선가시가 있는 마루방에서 만났다 저문 六月의 바닷가에선 조개도 울을 저녁 소라방등이 불그레안 마당에 김냄새 나는 비가 나렸다 2021. 2. 21.
燈明洛迦寺 못 가 보았네 - 이진명 燈明洛迦寺 못 가 보았네 이진명 저 멀리 바다 언덕 해송숲에 가린 등명락가사 갔다와 본 이들은 모두가 입을 모아 소리한다 아, 거긴 정말, 정말 거긴 거기는 꼭, 다시 한 번 꼬옥 부신 등을 금방 켠 듯 눈에 부신 등빛을 담고 잘 알려지지 않은 거기를 다시 꿈꾼다 등명락가사 갔다와 보지 못한 나는 무슨 큰 어두움에 몰리듯 부신 등빛 괴로워한다 흔들리며 흔들리며 등명락가사를 외운다 깊은 바다를 옆에 끌고 억겁을 일어서는 燈明樂 아니다, 우연한 여름날 뜨거운 햇살의 소용돌이 속에 눈감아 나도 등명락가사를 갔다와 본 적이 있다 검게 이운 해송숲 고속도로 바다쪽으로 돌며 꺾어진 뜻밖의 작은 길 하나 비치는 옷처럼 암벽이 드러나고 암벽 자락에 파란 숨은꽃처럼 마법처럼 * source: m.blog.naver.co.. 2021. 2. 21.
가족 - 김후란 가 족 김후란 거치른 밤 매운 바람의 지문이 유리창에 가득하다 오늘도 세상의 알프스산에서 얼음꽃을 먹고 무너진 돌담길 고쳐 쌓으며 힘겨웠던 사람들 그러나 돌아갈 곳이 있다 비탈길에 작은 풀꽃이 줄지어 피어 있다 멀리서 가까이서 돌아올 가족의 발자국 소리가 피아니시모로 울릴 때 집안에 감도는 훈기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 * source: m.blog.daum.net/barbara50/7476951 2021. 2.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