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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어주는 남자472

목도장 - 장석남 목도장 장석남 서랍의 거미줄 아래 아버지의 목도장 이름 세 글자 인주를 찾아서 한번 종이에 찍어보니 문턱처럼 닳아진 성과 이름 이 도장으로 무엇을 하셨나 눈앞으로 뜨거운 것이 지나간다 이 흐린 나라를 하나 물려주는 일에 이름이 다 닳았으니 국경이 헐거워 자꾸만 넓어지는 이 나라를 나는 저녁 어스름이라고나 불러야 할까보다 어스름 귀퉁이에 아버지 흐린 이름을 붉게 찍어놓으니 제법 그럴싸한 표구가 되었으나 그림은 비어있네 * tirol's thought 아버지는 무슨 서류에 그렇게 도장을 찍고 다니셨기에 도장이 문턱처럼 닳았을까 헐거워지는 국경처럼 빛과 어둠의 경계가 희미해지는 저녁 어스름이면 생각나는 것들 낙관도 찍고 표구도 되었는데 그림은 비어있다네. 아버지가 물려주신 흐린 나라는 빈 그림으로 내 앞에 있네. 2022. 1. 11.
비가 와도 젖은 자는 - 오규원 비가 와도 젖은 者는 오규원 巡禮 -1 그대와 나는 비를 멈출 수 없어 대신 추녀 밑에 멈추었었다. 그 후 그 자리에 머물고싶어 다시 한 번 멈추었었다. 비가 온다, 비가 와도 江은 젖지 않는다. 나를 젖게 해 놓고, 내 안에서 그대 안으로 젖지 않고 옮겨가는 시간은 우리가 떠난 뒤에는 비 사이로 혼자 들판을 가리라. 혼자 가리라, 江물은 흘러가면서 이 여름을 언덕 위로 부채질해 보낸다. 날려가다가 언덕 나무에 걸린 여름의 옷 한 자락도 잠시만 머문다. 魚族은 강을 거슬러 올라 하늘이 닿은 지점에서 일단 멈춘다. 나무, 번뇌, 날짐승 이런 이름 속에 얼마 쉰 뒤 스스로 그 이름이 되어 강을 떠난다. 비가 온다, 비가 와도 젖은 者는 다시 젖지 않는다. * tirol's thought 어제 갑자기 이 시가.. 2021. 7. 4.
나의 본적 本籍 - 김종삼 나의 본적 本籍 김종삼 나의 本籍은 늦가을 햇볕 쪼이는 마른 잎이다. 밟으면 깨어지는 소리가 난다. 나의 本籍은 巨大한 溪谷이다. 나무 잎새다. 나의 本籍은 푸른 눈을 가진 한 여인의 영원히 맑은 거울이다. 나의 本籍은 차원을 넘어다니지 못하는 독수리다. 나의 本籍은 몇 사람밖에 안 되는 고장 겨울이 온 敎會堂 한 모퉁이다. 나의 本籍은 人類의 짚신이고 맨발이다. * tirol's thought 본적(本籍)은 '호적(戶籍)'이 있는 곳. 어떤 사람이 태어나고 살던 곳. 2008년도에 호적제도가 폐지되어 이제는 '등록기준지'라는 말이 쓰인다고 한다. 나의 본적은 '충주시 용산동', 내 아버지와 할아버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태어나고 살던 곳, 내가 살았다가 떠나온 곳. 시인의 본적은 '늦가을 햇볕 쪼이는.. 2021. 6. 27.
여름의 할일 - 김경인 여름의 할일 김경인 올여름은 내내 꿈꾸는 일 잎 넓은 나무엔 벗어놓은 허물들 매미 하나 매미 둘 매미 셋 남겨진 생각처럼 매달린 가볍고 투명하고 한껏 어두운 것 네가 다 빠져나간 다음에야 비로소 생겨나는 마음과 같은 올여름의 할일은 모르는 사람의 그늘을 읽는 일 느린 속도로 열리는 울음 한 송이 둥글고 오목한 돌의 표정을 한 천사가 뒹굴다 발에 채고 이제 빛을 거두어 땅 아래로 하나둘 걸어들어가니 그늘은 돌이 울기 좋은 곳 고통을 축복하기에 좋은 곳 올여름은 분노를 두꺼운 옷처럼 껴입을 것 한 용접공이 일생을 바친 세 개의 불꽃 하나는 지상의 어둠을 모아 가동되는 제철소 담금질한 강철을 탕탕 잇대 만든 길에, 다음은 무거운 장식풍의 모자를 쓴 낱말들 무너지려는 몸통을 꼿꼿이 세운 날카로운 온기의 뼈대에,.. 2021. 6. 19.
내일은 프로 - 황병승 내일은 프로 황병승 침묵하거나 침묵하지 않으면서 나는 보여주고자 하였지요, 다양한 각도에서의 실패를. 독자들은 보았을까, 내가 보여주고자 한 실패. 보지 못했지...... 나는 결국 실패를 보여주는데 실패하고 말았다! 쓸모없는 독자들이여, 당신들은 어디에 있었는가. 불빛 속에서, 아름답게 흐르는 강물을, 다리 위에서, 보고 있었지. 어둠 속에서, 나는 밤낮으로 출렁거리며, 다리 아래서, 보여주고자 하였는데, 괴로워...... 그러게 말입니다 실패한 자로서, 실패의 고통을 안겨주는 이 페이지에서, 당신들이 수시로 드나들 이 페이지에서, 페이지가 너덜거리도록 당신들과 만나는 고통 속에서, "나는 실패를 보여주고자 하였으나 보기 좋게 실패하고 말았네. 이거 이거, 실패를 보여주기에는 역시 역부족이란 말인가. .. 2021. 6. 6.
아름다운 너무나 - 박라연 아름다운 너무나 박라연 우리가 누린 적 있는 눈부신 시간들은 잠시 걸친 옷이나 구두, 가방이었을 것이나 눈부신 만큼 또 어쩔 수 없이 아팠을 것이나 한 번쯤은 남루를 가릴 병풍이기도 했을 것이나 주인을 따라 늙어 이제 젊은 누구의 몸과 옷과 구두와 가방 아픔이 되었을 것이나 그 세월 사이로 새와 나비, 벌레들의 시간을 날게 하거나 노래하게 하면서 이제 그 시간들마저 허락도 없이 데려가는 중일 것이나 * tirol's thought 어제 오후에 우연히 KBS '다큐인사이트', '다큐멘터리 윤여정' 편을 봤다. 한국 배우 최초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수상으로 '눈부신 시간'을 보내고 있는 윤여정씨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그 중 강부자씨가 전한 윤여정씨의 말이 인상적이었다. “언니, 그거 식혜 위 밥풀이야. 식혜 위.. 2021. 5.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