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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어주는 남자472

사랑과 평화 - 이문재 사랑과 평화 이문재 사람이 만든 책보다 책이 만든 사람이 더 많다* 사람이 만든 노래보다 노래가 만든 사람이 더 많다 사람이 만든 길보다 길이 만든 사람이 더 많다 사랑으로 가는 길은 오직 사랑뿐 사랑만이 사랑으로 갈 수 있다 그래야 사람이 만든 사랑보다 사랑이 만든 사람이 더 많아진다 평화로 가는 길 또한 오직 평화뿐 평화만이 평화로 갈 수 있다 평화만이 평화를 만들 수 있다 그래야 사람이 만든 평화보다 평화가 만든 사람이 더 많아진다 이 또한 오래된 일이다 * '사람이 만든 책보다 책이 만든 사람이 더 많다’라는 문장은 출처가 밝혀지지 않은 채 널리 알려져 있다. * tirol's thought 사람은 무엇으로 만들어지는가 책과 노래와 길과 사랑과 평화 그리고... 사람이 만들어져 가는 존재라는 것을.. 2024. 2. 29.
거룩한 식사 - 황지우 거룩한 식사 황지우 나이든 남자가 혼자 밥 먹을 때 울컥, 하고 올라오는 것이 있다 큰 덩치로 분식집 메뉴표를 가리고서 등 돌리고 라면발을 건져올리고 있는 그에게, 양푼의 식은 밥을 놓고 동생과 눈흘기며 숟갈 싸움하던 그 어린 것이 올라와, 갑자기 목메게 한 것이다 몸에 한세상 떠넣어주는 먹는 일의 거룩함이여 이 세상 모든 찬밥에 붙은 더운 목숨이여 이 세상에서 혼자 밥 먹는 자들 풀어진 뒷머리를 보라 파고다 공원 뒤편 순댓집에서 국밥을 숟가락 가득 떠넣으시는 노인의, 쩍 벌린 입이 나는 어찌 이리 눈물겨운가 * tirol's thought 내 힘으로 숟가락을 들 수 있게 된 때부터 오늘까지 밥을 안먹고 보낸 날이 몇 일이나 될까 숟가락을 들어 몸에 한세상 떠넣어준 그 많은 날들 중에 내가 마주 앉았던 .. 2024. 2. 23.
개 발자국 - 김광규 개 발자국 김광규 온몸이 누런 털로 덮이고 슬픈 눈에 코끝이 까맣게 생긴 녀석. 뒤꼍 개집에서 봄여름 가을 나고, 겨울에는 차고 한구석에서 뒷발로 귀를 털면서 나이를 먹었지. 늘그막엔 주인집 거실 바닥에서 코를 골며 낮잠을 자기도 했다. 놈은 이 세상에 태어나 열여덟 해를 혼자 살았다. 물론 극진하게 보살펴주는 주인 내외와 딸이 있지만, 한마디로 말하자면 사고무친의 외톨이 아니었나. 천둥 벼락 치면서 폭우가 쏟아지는 날에는 놈이 위층 서재까지 뛰어 올라와 주인의 책상 아래 몸을 숨기기도 했다. 겁이 났던 모양이다. 놈을 야단치고 밖으로 쫓아내는 악역을 맡은 바깥주인도 이럴 때는 못 본 척 그대로 내버려두는 수밖에 없었다. 가족에 버금가는 대우를 해준 셈이었다. 이렇게 정든 놈이 몸뚱이만 남겨놓고 세상 틈.. 2023. 10. 8.
파 어린 시절 국에서 건져낸 파의 복수인가 남들은 식은 국 넘기듯 후루룩 파를 잘도 하던데 드라이버 잘 맞으면 아이언이 삐끗 아이언 잘 맞으면 어프로치 철퍼덕 어프로치 제대로면 짧거나 긴 퍼팅 파 건져 보겠다고 밥상 위에 젓가락 맞추듯 타아탁 골프채 두드리며 상 받고 상 물리니 벌써 십팔 홀 남들은 식은 죽 먹듯 파도 하고 버디도 하던데 파도 못 건지고 양파만 수두룩한 내 밥상 앞으로 먹나봐라 짜장면 먹을 때 양파 2023. 8. 5.
해저드 해저드 눈을 감고 치면 좀 나으려나 없는 것과 없다고 치는 것 사이는 얼마나 먼가 마음과 몸 사이의 거리는 또 얼마나 먼가 공은 공이고 나는 나건만 내가 치는 공이 어쩌자고 나처럼 물을 두려워하는가 이번엔 건너보자 없다고 치고 눈감았다 치고 힘빼고 빽 부드럽게 딱 한 뼘이 모자라네 물 속으로 꼬르륵 공은 물을 두려워하는게 아니라 사랑하는 건지도 몰라 물이 공을 부르는 건지도 몰라 노래하는 세이렌처럼 다음엔 귀를 막고 쳐볼까 그러면 좀 나을까 그나저나 해저드티는 어딘가 저 물을 보고 다시 한번 치라고? 2023. 8. 5.
슬라이스 슬라이스 꿀을 발라놨나 지남철을 붙여놨나 천관녀의 집을 찾아가는 김유신의 말도 아니고 자알 나가는 것 같다가 결국 오른쪽 그것도 오비 힘을 주고 쳐봐도 힘을 빼고 쳐봐도 왼발 위치를 옮겨봐도 그립을 바꿔 잡아봐도 소용없다 젠장 아예 방향을 좀 바꿔봐 그렇다고 말도 안되게 왼쪽을 볼 수는 없잖아 딱 맞혀서 똑 바르게 보내는 게 뭐 그렇게 어려운 거라고 자 그래도 다시 한번 숨을 가다듬고 천천히 에에델바아이스 딱 어어어 이번엔 왼쪽 흰 말뚝 너머로 날아간 공 이번 홀은 왼쪽이 오비 오른쪽이 해저드라네 그래도 혹시 모르니 한번만 더 쳐보면 안될까 2023. 7.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