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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본적 本籍 - 김종삼 나의 본적 本籍 김종삼 나의 本籍은 늦가을 햇볕 쪼이는 마른 잎이다. 밟으면 깨어지는 소리가 난다. 나의 本籍은 巨大한 溪谷이다. 나무 잎새다. 나의 本籍은 푸른 눈을 가진 한 여인의 영원히 맑은 거울이다. 나의 本籍은 차원을 넘어다니지 못하는 독수리다. 나의 本籍은 몇 사람밖에 안 되는 고장 겨울이 온 敎會堂 한 모퉁이다. 나의 本籍은 人類의 짚신이고 맨발이다. * tirol's thought 본적(本籍)은 '호적(戶籍)'이 있는 곳. 어떤 사람이 태어나고 살던 곳. 2008년도에 호적제도가 폐지되어 이제는 '등록기준지'라는 말이 쓰인다고 한다. 나의 본적은 '충주시 용산동', 내 아버지와 할아버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태어나고 살던 곳, 내가 살았다가 떠나온 곳. 시인의 본적은 '늦가을 햇볕 쪼이는.. 2021. 6. 27.
여름의 할일 - 김경인 여름의 할일 김경인 올여름은 내내 꿈꾸는 일 잎 넓은 나무엔 벗어놓은 허물들 매미 하나 매미 둘 매미 셋 남겨진 생각처럼 매달린 가볍고 투명하고 한껏 어두운 것 네가 다 빠져나간 다음에야 비로소 생겨나는 마음과 같은 올여름의 할일은 모르는 사람의 그늘을 읽는 일 느린 속도로 열리는 울음 한 송이 둥글고 오목한 돌의 표정을 한 천사가 뒹굴다 발에 채고 이제 빛을 거두어 땅 아래로 하나둘 걸어들어가니 그늘은 돌이 울기 좋은 곳 고통을 축복하기에 좋은 곳 올여름은 분노를 두꺼운 옷처럼 껴입을 것 한 용접공이 일생을 바친 세 개의 불꽃 하나는 지상의 어둠을 모아 가동되는 제철소 담금질한 강철을 탕탕 잇대 만든 길에, 다음은 무거운 장식풍의 모자를 쓴 낱말들 무너지려는 몸통을 꼿꼿이 세운 날카로운 온기의 뼈대에,.. 2021. 6. 19.
내일은 프로 - 황병승 내일은 프로 황병승 침묵하거나 침묵하지 않으면서 나는 보여주고자 하였지요, 다양한 각도에서의 실패를. 독자들은 보았을까, 내가 보여주고자 한 실패. 보지 못했지...... 나는 결국 실패를 보여주는데 실패하고 말았다! 쓸모없는 독자들이여, 당신들은 어디에 있었는가. 불빛 속에서, 아름답게 흐르는 강물을, 다리 위에서, 보고 있었지. 어둠 속에서, 나는 밤낮으로 출렁거리며, 다리 아래서, 보여주고자 하였는데, 괴로워...... 그러게 말입니다 실패한 자로서, 실패의 고통을 안겨주는 이 페이지에서, 당신들이 수시로 드나들 이 페이지에서, 페이지가 너덜거리도록 당신들과 만나는 고통 속에서, "나는 실패를 보여주고자 하였으나 보기 좋게 실패하고 말았네. 이거 이거, 실패를 보여주기에는 역시 역부족이란 말인가. .. 2021. 6. 6.
아름다운 너무나 - 박라연 아름다운 너무나 박라연 우리가 누린 적 있는 눈부신 시간들은 잠시 걸친 옷이나 구두, 가방이었을 것이나 눈부신 만큼 또 어쩔 수 없이 아팠을 것이나 한 번쯤은 남루를 가릴 병풍이기도 했을 것이나 주인을 따라 늙어 이제 젊은 누구의 몸과 옷과 구두와 가방 아픔이 되었을 것이나 그 세월 사이로 새와 나비, 벌레들의 시간을 날게 하거나 노래하게 하면서 이제 그 시간들마저 허락도 없이 데려가는 중일 것이나 * tirol's thought 어제 오후에 우연히 KBS '다큐인사이트', '다큐멘터리 윤여정' 편을 봤다. 한국 배우 최초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수상으로 '눈부신 시간'을 보내고 있는 윤여정씨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그 중 강부자씨가 전한 윤여정씨의 말이 인상적이었다. “언니, 그거 식혜 위 밥풀이야. 식혜 위.. 2021. 5. 2.
첫사랑 - 심재휘 첫사랑 심재휘 장충동에 비가 온다 꽃잎들이 서둘러 지던 그날 그녀와 함께 뛰어든 태극당 문 앞에서 비를 그으며 담배를 빼물었지만 예감처럼 자꾸만 성냥은 엇나가기만 하고 샴푸향기 잊혀지듯 그렇게 세월은 갔다 여름은 대체로 견딜 만하였는데 여름 위에 여름 또 여름 새로운 듯 새롭지 않게 여름 오면 급히 비를 피해 내 한 몸 겨우 가릴 때마다 비에 젖은 성냥갑만 늘었다 그래도 훨씬 많은 것은 비가 오지 않은 날들이었고 나뭇가지들은 가늘어지는 운명을 향해 걸어갔다 가늘어지기는 여름날 저녁의 비도 마찬가지였지만 그 후로 많은 저녁들이 나를 지나갔지만 발아래 쌓인 세월은 귀갓길의 느린 걸음에도 낡은 간판처럼 가끔 벗겨지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면 마른 꽃잎에게 묻는 안부처럼 들춰 보는 그 여름 저녁에는 여전히 버스만 .. 2021. 4. 18.
윤사월 - 박목월 윤사월(閏四月) 박목월 송홧(松花)가루 날리는 외딴 봉우리 윤사월 해 길다 꾀꼬리 울면 산직이 외딴 집 눈먼 처녀사 문설주에 귀 대이고 엿듣고 있다 tirol's thought 계절마다 나도 모르게 떠올리게 되는 시가 있다. 해마다 어느 가을 저녁이 되면 문득 김춘수의 '가을 저녁의 시'가 생각나고, 해마다 어느 봄날이면 문득 이 시를 떠올리고, 중얼거린다. '송홧가루 날리는/ 외딴 봉우리'... 이 시는 시인이 1946년 5월, 문예지 '상아탑'에 처음 발표했다고 하는데, 윤사월이 들었던 해를 찾아보니 1946년에는 윤달이 없었고 1944년에 윤사월이 있었다. 시인의 경험을 기초로 두어해 전 써두었던 시를 1946년에 발표한 것이거나 아니면 상상으로 쓴 것이리라. 내 짐작으로는 윤사월이 들었던 1944.. 2021. 4.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