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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4

메밀국수 - 박준 메밀국수 - 철원에서 보내는 편지 박준 분지의 여름밤에는 바람이 없습니다 밤이 되어도 화기火氣가 가시지 않을 것 같아 저녁밥을 안치는 대신 메밀국수를 사 먹고 돌아왔습니다 동송으로 가면 삼십년 된 막국수집이 있고 갈말로 가면 육십 년 된 막국수집이 있는데 저는 이 시차를 생각하며 혼자 즐거웠습니다 그러고 보니 지난번 말한 제 아버지는 사십 년 동안 술을 드셨고 저는 이십 년 동안 마셨습니다 돌아오는 길, 문밖으로 나와 연신 부채질을 하던 이곳 사람들은 하나같이 저에게 저녁을 먹었는지 물었습니다 국수를 먹었다고 대답하기도 했고 몇 분에게는 웃으며 고개만 끄덕였습니다 주인집 어른께는 입맛이 없어 걸렀다고 답했다가 "저녁은 저녁밥 먹으라고 있는 거지"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주말에 큰비가 온다고 하니 이곳 사람들.. 2020. 6. 27.
연애에 대하여 - 이성복 연애에 대하여 이성복 1 여자들이 내 집에 들어와 지붕을 뚫고 담 넘어간다 손이 없어 나는 붙잡지 못한다 벽마다 여자만한 구멍이 뚫려 있다 여자들이 내 방에 들어와 이불로 나를 덮어 싼다 숨 막혀 죽겠어 ! 이불 위에 올라가 여자들이 화투를 친다 숨 막힌 채로 길 떠난다 길 가다 외로우면 딴 생각하는 길을 껴안는다 2 기도의 형식으로 나는 만났다 버리고 버림받았다 기도의 형식으로 나는 손 잡고 입맞추고 여러 번 죽고 여러 번 태어났다 흐르는 물을 흐르게 하고 헌 옷을 좀먹게 하는 기도, 완벽하고 무력한 기도의 형식으로 나는 숨쉬고 숨졌다 지금 내 숨가쁜 屍身을 밝히는 촛불들 愛人들, 지금도 불 밝은 몇몇의 술집 3 내 살아 있는 어느 날 어느 길 어느 골목에서 너를 만날지 모르고 만나도 내 눈길을 너는 .. 2020. 6. 21.
우산을 쓰다 - 심재휘 우산을 쓰다 심재휘 어제는 꽃잎이 지고 오늘은 비가 온다고 쓴다 현관에 쌓인 꽃잎들의 오랜 가뭄처럼 바싹 마른 나의 안부에서도 이제는 빗방울 냄새가 나느냐고 추신한다 좁고 긴 대롱을 따라 서둘러 우산을 펴는 일이 우체국 찾아가는 길만큼 낯설 것인데 오래 구겨진 우산은 쉽게 젖지 못하고 마른 날들은 쉽게 접히지 않을 터인데 빗소리처럼 오랜만에 네 생각이 났다고 쓴다 여러 날들 동안 비가 오지 않아서 많은 것들이 말라 버렸다고 비 맞는 마음에는 아직 가뭄에서 환도하지 못한 것들이 많아서 너무 미안하다고 쓴다 우습게도 이미 마음은 오래전부터 진창이었다고 쓰지 않는다 우산을 쓴다 tirol's thought 비는 언젠가는 올 것인데 비가 오지 않는 동안은 영영 오지 않을 것처럼 느껴진다 비가 오지 않은 여러 날.. 2020. 6. 14.
정지의 힘 - 백무산 정지의 힘 백무산 기차를 세우는 힘, 그 힘으로 기차는 달린다 시간을 멈추는 힘, 그 힘으로 우리는 미래로 간다 무엇을 하지 않을 자유, 그로 인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안다 무엇이 되지 않을 자유, 그 힘으로 나는 내가 된다 세상을 멈추는 힘, 그 힘으로 우리는 달린다 정지에 이르렀을 때, 우리는 달리는 이유를 안다 씨앗처럼 정지하라, 꽃은 멈춤의 힘으로 피어난다 2020. 6.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