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2019/033

익숙해진다는 것 - 고운기 익숙해진다는 것 고운기 오래된 내 바지는 내 엉덩이를 잘 알고 있다 오래된 내 칫솔은 내 입안을 잘 알고 있다 오래된 내 구두는 내 발가락을 잘 알고 있다 오래된 내 빗은 내 머리카락을 잘 알고 있다 오래된 귀갓길은 내 발자국 소리를 잘 알고 있다 오래된 아내는 내 숨소리를 잘 알고 있다 그렇게 오래된 것들 속에 나는 나를 맡기고 산다 바지도 칫솔도 구두도 빗도 익숙해지다 바꾼다 발자국 소리도 숨소리도 익숙해지다 멈춘다 그렇게 바꾸고 멈추는 것들 속에 나는 나를 맡기고 산다 tirol's thought 오래되고 익숙해진 것들에 감사하기 때가 되면 바꾸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기 오래되고 익숙해진 것들을 조용히 바라보기 때가 되면 멈추는 것을 받아들이기 그렇게 오래된 것들 속에 그렇게 바꾸고 멈추는 것들 속에.. 2019. 3. 28.
다시 봄이 왔다 - 이성복 다시 봄이 왔다 이성복 비탈진 공터 언덕 위 푸른 풀이 덮이고 그 아래 웅덩이 옆 미루나무 세 그루 갈라진 밑동에도 푸른 싹이 돋았다 때로 늙은 나무도 젊고 싶은가 보다 기다리던 것이 오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누가 누구를 사랑하고 누가 누구의 목을 껴안 듯이 비틀었는가 나도 안다 돼지 목 따는 동네의 더디고 나른한 세월 때로 우리는 묻는다 우리의 굽은 등에 푸른 싹이 돋을까 묻고 또 묻지만 비계처럼 씹히는 달착지근한 혀, 항시 우리들 삶은 낡은 유리창에 흔들리는 먼지 낀 풍경 같은 것이었다 흔들리며 보채며 얼핏 잠들기도 하고 그 잠에서 깨일 땐 솟아오르고 싶었다 세차장 고무 호스의 길길이 날뛰는 물줄기처럼 갈기갈기 찢어지며 아우성치며 울고불고 머리칼 쥐어뜯고 몸부림치면서...... 그런 일은 없었.. 2019. 3. 21.
다시 한번 - 손월언 다시 한번 손월언 기다림을 위하여 말을 멈추고 사물들을 바라보라 말은 공기 속을 송곳처럼 파고 달려드는 고속 열차와 같이 사물의 정체와 관계에 상처를 입힌 뒤 목적지에 도착한다 착각과 왜곡이라는 두 바퀴에 얹혀 달리는 오래된 현재 기다림은 또다시 말을 위해 있고 우리는 기다림을 위해 있다 tirol's thought 우리는 기다림을 위해 있고 기다림은 말을 위해 있다면 말은 무엇을 위해 있는걸까 '말은...사물의 정체와 관계에 상처를 입힌 뒤 목적지에 도착한다' 라는 구절이 마음에 오래 남는다. 우리의 말은 우리가 서로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는 오해 위에서 오고가는 편도 열차 같은 게 아닐까 2019. 3.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