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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어주는 남자

어제 - 박정대

by tirol 2005. 5. 16.
어제

박정대


어제는 네 편지가 오지 않아 슬펐다, 하루 종일 적막한 우편함을 쳐다보다가 이내 내 삶이 쓸쓸해져서, <복사꽃 비 오듯 흩날리는데, 그대에게 권하노니 종일 취하라, 劉伶도 죽으면 마실 수 없는 술이거니!>, 李賀의 <將進酒>를 중얼거리다가 끝내 술을 마셨다, 한때 아픈 몸이야 술기운으로 다스리겠지만, 오래 아플 것 같은 마음에는 끝내 비가 내린다

어제는 네 목소리가 들리지 않아 슬펐다, 하루 종일 환청에 시달리다 골방을 뛰쳐나가면 바람에 가랑잎 흩어지는 소리가, 자꾸만 부서지려는 내 마음의 한 자락 낙엽 같아 무척 쓸쓸했다, 빗자루를 들고 마당을 쓸면 메마른 가슴에선 자꾸만 먼지가 일고, 먼지 자욱한 세상에서 너를 향해 부르는 내 노래는 자꾸만 비틀거리며 넘어지려고 한다

어제는 네 모습이 보이지 않아 슬펐다, 네가 너무나 보고 싶어 언덕 끝에 오르면 가파른 생의 절벽 아래로는 파도들의 음악만이 푸르게 출렁거리고 있었다, 그 푸른 음악의 한가운데로 별똥별들이 하얗게 떨어지고, 메마른 섬 같은 가을도 함께 뚝뚝 떨어지고 있었는데, 내가 정신을 가다듬고 내 낡은 기타를 매만질 때, 너는 서러운 악보처럼 내 앞에서 망연히 펄럭이고 있었다

어제는 너무 심심해 오래된 항아리 위에 화분을 올려놓으며, 우리의 사랑도 이렇게 포개어져 오래도록 같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새우젓 장수가 지나가든 말든, 우리의 생이 마냥 게으르고 평화로울 수 있는, 일요일 같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제는 두툼한 외투를 껴입고 밤새도록 몇 편의 글을 썼다, 추운 바람이 몇 번씩 창문을 두드리다 갔지만 너를 생각하면, 그 생각만으로도 내 마음속 톱밥 난로에 불이 지펴졌다, 톱밥이 불꽃이 되어 한 생애를 사르듯, 우리의 生도 언젠가 별들이 가져가겠지만

그때까지 사랑이여, 내가 불멸이 아니어서 미안하다

그때까지 사랑이여, 나는 불멸이 아니라 오래도록 너의 음악이다



/박정대 시집, 아무르 기타, 문학사상사, 2004/


* tirol's thought

원래 그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퇴근 무렵 무심결에 옆자리의 K차장님 더러 '술이나 한잔 하자'고 했다가 거절 당했다. 오늘은 딸래미보러 일찍 들어가야 한단다, 게다가 월요일이고. (술 마시는 데 요일이 따로있나.) 딱히 술이 먹고 싶었던 것도 아닌데, 거절을 당하고 나니까 새삼스럽게 술이 너무 먹고 싶어졌다. 옆부서에 근무하는 L에게 전화를 넣어서 한잔 하자고 했더니 오늘은 월요일이라서 안된단다. (도대체 술마시는 데 요일이 무슨 상관이냐고!) 흠...그럼 누굴 꼬셔볼까. 무심결에 시작되어 예기치 못한 욕망과 집착으로 이어지는 生. 한잔 마시긴 마셔줘야 할터인데...

p.s : 아내가 요즘 tirol's thought가 너무 식상하다고, 무슨 말이 나올지 빤하게 보인다고 핀잔을 줬는데...박정대의 시에 이렇게 아무런 상관없는(?) 코멘트가 달리리라곤 예상하지 못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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