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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어주는 남자

악어 - 고영민

by tirol 2005. 5. 11.
악어

고영민


지하철 문에 한 여자의 가방이 물려 있다 강을 건너다 잡힌 새끼 누 같다 겁에 질린 가방은 필사적으로 뒤척이지만 단단한 하악(下顎)은 좀처럼 열리지 않는다 더 깊은 질식 속으로 끌고 들어간다 언제가 나도 저 강을 건너다 어깨 부위를 물린 적이 있다 깊은 흉터가 있다 예측할 수 없는 저 입은 어미와 새끼를 갈라놓고 동료를 애인을 갈라놓기도 한다 새끼를 따라 시골에서 올라 온 한 늙은 어미가 혼자 입안에 갇혀 공포에 가까운 눈으로 문을 두드리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밖에선 새끼가 떠내려가는 제 늙은 어미를 지켜보고 있었다 저 매정한 입은 몇 정거장을 지나쳐도 열리지 않고 숨이 잦아든 여자는 멍하니 제 깊은 상처, 물린 가방을 지켜보고 있다 반대편으론 다시 수많은 사람들이 닫히는 입을 피해 강으로 뛰어들고 다시 재빨리 뛰어나가고 있다 또 한사람이 센 물살에 떠밀려 팔 한쪽이 물렸다 용케 빼낸다 살아난다 이 乾期의 땅, 유유히 강은 흐른다


/시와정신, 2004년 가을호/

* tirol's thought

'시골에서 올라 온 늙은 어미'에 관한 부분이 좀 상투적으로 느껴지긴 하지만 지하철 문을 악어 입으로, 지하철을 '乾期의 땅, 유유히 흐르는 강'으로 읽는 비유는 설득력이 있다.
'언제가 나도 저 강을 건너다 어깨 부위를 물린 적이' 있기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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