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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어주는 남자

요약 - 이갑수

by tirol 2005. 1. 27.
요약

이갑수


모든 일은 시작하는 순간 반으로 요약된다
배부름은 첫술에 요약되어 있다
어떤 술도 그 맛은 첫잔과 마주한 사람이 나누어 좌우한다
귀뚜라미는 소리로서 그 존재를 간단히 요약한다
평행한 햇살을 요약하여 업은 잎사귀 하나 아래로 처지고 있다
방향은 가늘게 요약되어 동쪽은 오로지 동쪽만을 묵묵히 담당한다
요란한 것들을 집합시켜 보면 사소한 것 하나로 요약할 수 있다
물질은 한 분자에 성질을 전부 요약하여 담는다
한 방울 바닷물이 바다 전체를 요약하고 있다
서해는 서해를 찾아드는 모든 강의 이름을 요약한다
목숨은 요약되어 한 호흡과 호흡 사이에 있다
파란만장한 생애는 굵고 검은 활자로 요약되어 부음란에 하루 머무른다
하루살이는 일생을 요약하여 하루에 다 산다

너는 모든 남을 요약하여 내게로 왔다


/이갑수 시집, 현대적, 민음사, 1994/

* tirol's thought

나는 무엇으로 요약될 수 있을까
나로 요약된 것을 풀어놓으면 무엇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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