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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어주는 남자

눈 오는 날 콩나물국밥집에서 - 복효근

by tirol 2004. 12. 23.
눈 오는 날 콩나물국밥집에서

복효근


눈이 뿌리기 시작하자
나는 콩나물국밥집에서 혼자 앉아
국밥을 먹는다 입을 데는 줄도 모르고
시들어버린 악보 같은 노란 콩나물 건더기를 밀어넣으며
이제 아무도 그립지도 않을 나인데
낼모레면 내 나이가 사십이고
밖엔 눈이 내린다 이런 날은
돈을 빌려달라는 놈이라도 만났으면 싶기도 해서
다만 나는 콩나물이 덜 익어 비릿하다고 투정할 뿐인데
자꾸 눈이 내리고
탕진해버린 시간들을 보상하라고
먼 데서 오는 빚쟁이처럼
가슴 후비며 어쩌자고 눈은 내리고
국밥 한 그릇이 희망일 수 있었던,
술이 깨고 술 속이 풀려야 할 이유가 있던
그 아픈 푸른 시간들이 다시 오는 것이냐
눈송이 몇 개가 불을 지펴놓는
새벽 콩나물국밥집에서 풋눈을 맞던 기억으로
다시 울 수 있을까 다시 그 설레임으로
심장은 뛸 수 있을까 사십에
그까짓 눈에 속아
입천장을 데어가며 시든 콩나물 악보를 밀어넣는다.


* tirol's thought

그래도 연말이라고, 지난 다이어리를 뒤적거리며 한해를 더듬어본다. 때론 알아보기 힘든 글씨들도 있고, 무슨 이유인지 기억나진 않지만 박박 줄을 그어 지워버린 얘기들도 있고, 제법 정갈하게 쓰여진 부분도 있고, 아예 날자가 비어 있는 날도 있다. 업무용 다이어리 두권과 조그만 개인용 수첩 한권 (회사에 있었던 시간 외에, 아침에 뭘 먹었는지, 누구와 점심을 먹었는지, 저녁엔 뭘했는지를 주로 기록하는 노트)으로 남은 한해.
딱히 크게 잘못한 일이 있었다던가 후회스러운 사건이 있었던 건 아닌데 왠지 좀 허전하다. 어떤 형체를 이루지 못하고 조각조각 부서진 시간들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고. 그래도 올해는 내 인생에 큰 다리를 하나 건넜으니 그것으로 의미 있는 한해였다고 말할 수도 있으려나?
눈도 안오고, 혼자 콩나물국밥을 먹는 것도 아닌데,
그래도 연말이라고, 가슴 먹먹하게 회한에 젖어보는 아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