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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어주는 남자

세상의 모든 뿌리는 젖어 있다 - 강연호

by tirol 2018. 11. 16.

세상의 모든 뿌리는 젖어 있다

강연호


문득 떨어진 나뭇잎 한 장이 만드는
저 물 위의 파문, 언젠가 그대의 뒷모습처럼
파문은 잠시 마음 접혔던 물주름을 펴고 사라진다
하지만 사라지는 것은 정말 사라지는 것일까
파문의 뿌리를 둘러싼 동심원의 기억을 기억한다
그 뿌리에서 자란 나이테의 나무를 기억한다
가엾은 연초록에서 너무 지친 초록에 이르기까지
한 나무의 잎새들도 자세히 보면
제각기 색을 달리하며 존재의 경계를 이루어
필생의 힘으로 저를 흔든다
처음에는 바람이 나뭇잎을 흔드는 줄 알았지
그게 아니라 아주 오랜 기다림으로 스스로를 흔들어
바람도 햇살도 새들도 불러모은다는 것을
흔들다가 저렇게 몸을 던지기도 한다는 것을
기억한다, 모든 움직임이 정지의 무수한 연속이거나
혹은 모든 정지가 움직임의 한순간이듯
물 위에 떠서 머뭇거리는 저 나뭇잎의 고요는
사라진 파문의 사라지지 않은 비명을 숨기고 있다
그러므로 글썽한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아도
세상의 모든 뿌리가 젖어 있는 것은 당연하다

* 강연호 시집, 세상의 모든 뿌리는 젖어 있다, 문학동네, 2001년 9월


tirol's thought

'문득'이라는 단어는 논리적이지 않다.
왜 지금, 여기서, 이 맥락에 '문득' 이런 장면이 벌어지는가, 이런 생각이 떠오르는가.
그런 '문득'의 틈 사이로 흘낏 넘겨다 보는 오래되고, 깊고, 다른 세계.
나는 얼마나 '대충' 살고 있는 것일까.
얼마나 눈여겨 보지 않고, 귀기울여 듣지 않고, 마음열어 헤아리지 못하는 것일까.
'문득 떨어져' '물 위에 떠서 머뭇거리는' '저 나뭇잎의 고요'가 슬쩍 보여주는 '뿌리'의 젖은 눈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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