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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어주는 남자

메밀국수 - 박준

by tirol 2020. 6. 27.

메밀국수

- 철원에서 보내는 편지

 

박준

 

 

   분지의 여름밤에는 바람이 없습니다 밤이 되어도 화기火氣가 가시지 않을 것 같아 저녁밥을 안치는 대신 메밀국수를 사 먹고 돌아왔습니다

 

   동송으로 가면 삼십년 된 막국수집이 있고 갈말로 가면 육십 년 된 막국수집이 있는데 저는 이 시차를 생각하며 혼자 즐거웠습니다 그러고 보니 지난번 말한 제 아버지는 사십 년 동안 술을 드셨고 저는 이십 년 동안 마셨습니다

 

   돌아오는 길, 문밖으로 나와 연신 부채질을 하던 이곳 사람들은 하나같이 저에게 저녁을 먹었는지 물었습니다 국수를 먹었다고 대답하기도 했고 몇 분에게는 웃으며 고개만 끄덕였습니다 주인집 어른께는 입맛이 없어 걸렀다고 답했다가 "저녁은 저녁밥 먹으라고 있는 거지"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주말에 큰비가 온다고 하니 이곳 사람들은 그 전까지 배추 파종을 마칠 것입니다 겨울이면 그 흰 배추로 만두소를 만들 것이고요

 

   그때까지 제가 이곳에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요즘은 먼 시간을 헤아리고 생각해보는 것이 좋습니다 그럴 때 저는 입을 조금 벌리고 턱을 길게 밀고 사람을 기다리는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더 오래여도 좋다는 눈빛도 제법 멀리 두고 말입니다

 

 

<박준,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 문학과지성사, 2018>

 

 

tirol's thought

 

시를 읽고 제가 술을 마신 지가 얼마나 되었는지 헤아려 보았는데 올해로 삽십 일년이 되었습니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술을 드셨을 년 수와 삽십 일년과 그 년 수와의 시차를 생각하다 혼자 쓸쓸해졌습니다

 

세번째 연을 읽으면서는 왜 주인집 어른에게 솔직하게 국수를 먹었다고 얘기를 안하고 '입맛이 없어 걸렀다'라고 답을 했을까 궁금해졌는데 집에서 밥을 안 해먹고 나가서 사 먹고 돌아오는 길이라고 말하는 게 좀 마음에 걸려서 그런 건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해 보니 고개가 끄덕여졌습니다 "저녁은 저녁밥 먹으라고 있는 거지"라는 말은 언젠가 한번 써먹어 봐야겠습니다

 

'그때까지 이곳에 있을지는 모르겠다'는 시인의 말처럼 미래가 어떻게 될지는 누구도 모르는 일이지만 '입을 조금 벌리고 턱을 길게 밀고 사람을 기다리는 표정'으로 먼 시간을 헤아리고 생각해 보는 까닭은 '당신과 함께 보낼 수도 있을' 그 시간을 떠올리는 일이 '화기'가 가시지 않는 '오늘'을 살아가게 하는 힘이 되기도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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