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 읽어주는 남자

오늘, 쉰이 되었다 - 이면우

by tirol 2019. 5. 10.

오늘, 쉰이 되었다

 

이면우

 

 

  서른 전, 꼭 되짚어보겠다고 붉은 줄만 긋고 영영 덮어버린 책들에게 사죄한다 겉 핥고 아는 체했던 모든 책의 저자에게 사죄한다

 

  마흔 전, 무슨 일로 다투다 속맘으론 낼, 모레쯤 화해해야지 작정하고 부러 큰 소리로 옳다고 우기던 일 아프다 세상에 풀지 못한 응어리가 아프다

 

  쉰 전, 늦게 둔 아이를 내가 키운다고 믿었다 돌이켜보면, 그 어린 게 날 부축하며 온 길이다 아이가 이 구절을 마음으로 읽을 때쯤이면 난 눈썹 끝 물방울 같은 게 되어 있을 게다

 

  오늘 아침, 쉰이 되었다, 라고 두 번 소리내어 말해보았다

  서늘한 방에 앉았다가 무릎 한번 탁 치고 빙긋이 혼자 웃었다

  이제부턴 사람을 만나면 좀 무리를 해서라도

  따끈한 국밥 한그릇씩 꼭 대접해야겠다고, 그리고

  쓸쓸한 가운데 즐거움이 가느다란 연기처럼 솟아났다

 

<이면우, 아무도 울지 않는 밤은 없다, 창비, 2001>

 

* tirol's thought

 

술을 어정쩡하게 먹어서 그런가 

새벽에 잠이 깨서 거실을 어슬렁거리다

우연히 이면우 시인의 시집을 꺼내 읽었다.

시집 중간 중간 한 쪽 귀퉁이를 접어둔 곳도 있고

밑줄을 치거나 메모를 해둔 페이지도 있다.

그런데 이 시가 있는 페이지에는 아무런 표식이 없다.

시집 앞에 적어둔 날짜를 보니 2010.1.6.

그때는 이 시가 실감이 안났을 수도 있겠다.

이 시를 읽는 오늘의 내 모습을 상상해 보기 어려웠을 수도 있겠다.

이른 새벽 십년 만에 다시 휘리릭 읽어보는 시집에서 

제일 마음에 걸리는 시는 바로 이 시다. 

'쓸쓸한 가운데 즐거움이 가느다란 연기처럼 솟아'나는 것 같기도 하다. 

'시 읽어주는 남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춘추 - 김광규  (2) 2019.06.22
산산조각 - 정호승  (0) 2019.06.08
국수 - 백석  (2) 2019.05.02
익숙해진다는 것 - 고운기  (0) 2019.03.28
다시 봄이 왔다 - 이성복  (0) 2019.03.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