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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어주는 남자

만년필 - 송찬호

by tirol 2006. 3. 22.

만년필

송찬호

이것으로 무엇을 이룰 수 있었을 것인가 만년필 끝 이렇게 작고 짧은 삽날을 나는 아직껏 본 적이 없다

한때, 이것으로 허공에 광두정을 박고 술 취한 넥타이나 구름을 걸어두었다 이것으로 근엄한 장군의 수염을 그리거나 부유한 앵무새의 혓바닥 노릇을 한 적도 있다 그리고 지금은 이것으로 공원묘지에 일을 얻어 비명을 읽어주거나, 비로소 가끔씩 때늦은 후회의 글을 쓰기도 한다.

그리하여 볕 좋은 어느 가을날 나는 눈썹 까만 해바라기씨를 까먹으면서, 해바라기 그 황금 원반에 새겨진'파카'나 '크리스탈'이니 하는 빛나는 만년필시대의 이름들을 추억해보는 것이다.

그러면서 나는 오래된 만년필을 만지작거리며 지난날 습작의 삶을 돌이켜본다--만년필은 백지의 벽에 머리를 짓찧는다 만년필은 캄캄한 백지 속으로 들어가 오랜 불면의 밤을 밝힌다.--어떤 수사는 모두 고통스런 지난 일들이다!

하지만 나는 책상 서랍을 여닫을 때마다 혼자 뒹굴어다니는 이 잊혀진 필기구를 보면서 가끔은 이런 상념에 젖기도 하는 것이다.--거품 부글거리는 이 잉크의 늪에 한 마리 푸른 악어가 산다.



* tirol's thought

오른쪽 검지 손가락이 아프다. 혼자 생각으로는 마우스 클릭버튼을 너무 많이 써서 그런게 아닌가 싶다.  오후가 되면 눈도 많이 아프다. 그또한 컴퓨터 모니터를 너무 많이 보는 탓이라 생각한다. 일전에 한번은 인터넷이 먹통이 되었던 적이 있었는데 그때 이런 생각을 해봤다. '컴퓨터가 없던 시절엔, 인터넷이 안되던 때엔 어떻게 일을 하고 살았을까?' 손으로 쓰고, 발로 찾아다녔으리라. 그 시절에 비해 '업무생산성'은 올라갔겠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이 그때보다 더 좋아졌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까?
가끔씩 ' 책상 서랍을 여닫을 때마다 혼자 뒹굴어다니는 잊혀진 필기구를' 꺼내 잉크를 채워넣어 써보곤 하지만 일주일을 넘기긴 어렵다.
돌이킬 수 없는 것은 세월만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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