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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어주는 남자

기념식수 - 이문재

by tirol 2006. 2. 27.
기념식수

이문재


형수가 죽었다
나는 그 아이들을 데리고 감자를 구워 소풍을 간다
며칠 전에 내린 비로 개구리들은 땅의 얇은
천장을 열고 작년의 땅 위를 지나고 있다
아이들은 아직 그 사실을 모르고 있으므로
교외선 유리창에 좋아라고 매달려 있다
나무들이 가지마다 가장 넓은 나뭇잎을 준비하려
분주하게 오르내린다
영혼은 온몸을 떠나 모래내 하늘을
출렁이고 출렁거리고 그 맑은 영혼의 갈피
갈피에서 삼월의 햇빛은 굴러떨어진다
아이들과 감자를 구워 먹으며 나는 일부러
어린왕자의 이야기며 안데르센의 추운 바다며
모래사막에 사는 들개의 한살이를 말해주었지만
너희들이 이 산자락 그 뿌리까지 뒤져본다 하여도
이 오후의 보물찾기는
또한 저문 강물을 건너야 하는 귀갓길은
무슨 음악으로 어루만져주어야 하는가
형수가 죽었다
아이들은 너무 크다고 마다했지만
나는 너희 엄마를 닮은 은수원사시나무 한 그루를
너희들이 노래 부르며
파놓은 푸른 구덩이에 묻는다
교외선의 끝 철길은 햇빛
철 철 흘러넘치는 구릉지대를 지나 노을로 이어지고
내 눈물 반대쪽으로
날개로 흔들지 않고 날아가는 것은
무한정 날아가고 있는 것은


* tirol's thought

'교외선 유리창에 좋아라고 매달려'
시끄럽게 떠드는 아이들을 상상해 보시라.
누군가는 그 아이들 옆에 앉아있는,
아버지라고 보기엔 조금 젊어보이는,
그 아이들의 보호자처럼 보이는 그를 비난할지도 모른다.
아이들에게 공중도덕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그의 무신경을 마음 속으로 힐난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아이들의 사연을,
삼촌과 함께 '감자를 구워 소풍을 나오듯'
어미의 무덤을 찾은 철없는 아이들의 사연을 알고 난 후에도
그 아이들을 향해 비난의 손가락질을 할 수 있는 자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우리가 비난하고 원망하고 욕하는 사람들의 속 사정을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그 사정을 깊이 깊이 알고 난 후에도
우리가 비난할 수 있는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
우리들은 얼마나 오만한지,
내가 보는 것이, 내 생각이 전부라고 믿고
얼마나 거들먹거리며 살아가는지.
참을 수 없을만큼 내 눈에, 귀에 거슬리는 일이 있을 때
한번 생각해 볼 일이다.
내가 알지 못하는 사연이 있을지 모른다.
내가 보는 것이 전부가 아닐지도 모른다.
왜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하지 못할까.
(그렇게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도 또 나름의 사연이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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